ADVERTISEMENT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준결승 관전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대국 전날 밤 조치훈9단은 소주를 가볍게 두잔쯤 했다.

대국장이자 선수들의 숙소인 삼성화재 유성연수원에서 이창호9단은 유년시절의 라이벌이었던 유시훈7단과 당구를 배우며 보냈고 중국대표 마샤오춘 (馬曉春) 9단은 방에 틀어박혔다.

2일 오전 9시. 조치훈9단은 평소의 습관대로 대국 개시 30분 전에 대국장에 나타났다.

TV중계 준비등으로 부산한 탓인지 평소처럼 눈을 감고 묵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30분을 앉아 다가올 승부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조치훈대 이창호. 그것은 바둑계에선 굉장한 승부였다.

바둑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일수록 이 승부에 몸살을 했다.

이창호9단은 세계최강이며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창호는 아직 젊어서 인생의 철학을 터득할만한 나이는 아니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면 이창호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에 비하면 조치훈9단은 좌절과 인내, 그리고 바닥에서부터의 재기등 삶의 구석구석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사람들은 힘은 이창호지만 예도 (藝道) 의 차원에선 조치훈쪽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바둑인생의 절정에 선 두사람의 대결은 과연 누구의 승리로 돌아갈까. 10분전에 馬9단과 유시훈이 동시에 입장했고 9시반에서 정확히 1분전이 되자 이창호가 들어섰다.

이9단은 언제나 대국 개시시각에 꼭 맞춰 들어온다.

처음부터 조치훈의 장고가 거듭됐다.

이창호의 어려운 주문에 그는 마냥 시간을 쓰다가 불과 83수에서 초읽기에 몰렸다.

조9단이 공격하자 이9단은 기막힌 수순으로 타개해버렸고 그순간 조9단은 비관에 빠졌다.

아직은 형세가 미세했으나 이창호와 미세해지면 누구나 불리하다는 심정이 된다.

이 비관이 바둑을 점점 더 악화시켰다.

유시훈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6전6패을 한 천적 마샤오춘을 완벽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유시훈은 종반전이 약점이지만 이상태라면 걱정할 것도 없어보였다.

바둑판 밖에선 조훈현9단과 유창혁9단이 TV해설에 나섰고 백성호9단 김수영7단은 유니텔에서 해설했다.

인터넷 해설팀은 양재호9단과 여류기사 남치형초단, 그리고 명지대 바둑학과 2학년의 이경민양. 서울대 영문과 출신의 남초단은 바둑계 최초의 영문해설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서양 팬들의 잠을 깨웠다.

이창호는 조치훈을 벼랑끝으로 몰고있었고 조9단은 기어이 돌을 던지고 말았다.

조치훈은 대국장을 떠나지 못하고 망연한 모습으로 유시훈의 바둑을 보고있었다.

유7단은 종반전에 실착을 거듭하더니 기어이 역전당하고 말았다.

검토실에선 유7단이 무려 20집을 도둑맞았다고 했다.

이 한판을 재기의 분수령으로 삼아 심혈을 기울여온 유시훈은 너무도 허탈한듯 말을 잊지 못했다.

새벽 1시무렵 연수원 근처의 어둠에 쌓인 길을 조치훈9단이 술에 젖어 걷고있었다.

그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래토록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전 = 박치문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