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그림자를 죽이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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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5대 재벌기업의 '상호 빚보증' 을 놓고 금융감독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재정경제부.은행.재벌기업이 이것이야말로 경제위기를 푸는데 가로놓인 최대 장애물인듯 매달려 몇달을 두고 끙끙거리며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것을 보면 딱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또 수상스럽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하자. 상호 빚보증은 본체 (本體)가 아니라 억지로 만든 그림자에 불과하다.

본체는 빚 그 자체다.

상호 빚보증은 이미 '보증' 이 아니다.

빚을 준 은행과 빚을 얻은 기업이 서로 짜고 상상해낸 것에 불과하다.

상호출자와 경위 (經緯)가 같다.

A사가 B사의 주식에 1천만원 출자하고 B사는 A사의 주식에 1천2백만원을 출자하고 있다고 하자.이런 경우 금액으로서의 진정한 출자액은 1천2백만원과 1천만원을 서로 상계 (相計) 한 다음에 남는 B사가 A사에 출자한 2백만원이 전부다.

이 두 금액을 상계하는 대신 액면대로 2천2백만원의 주식이 실재 (實在) 한다고 본다면 이 두 회사의 다른 주주와 채권자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이 두 회사 사이에는 상호출자 금액만큼의 '출자' 는 실재하지 않으나 혹종의 '공모 (共謀)' 만은 실재함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은행은 철저하게 부동산 담보 위주로 대출을 해 왔다.

담보가 모자라게 되니 할 수 없이 계열사의 지급보증을 받고 대출하게 됐다.

종래 (從來) 지급보증을 해주던 회사도 담보력이 다하는 때가 왔다.

이미 과잉대출이 생긴 것이다.

빚보증을 받고 있는 회사까지 빚보증을 설 수 있게 했다.

은행과 기업이 '공모' 해 스스로 속고 서로 속이기로 작정했다.

보증능력 없는 빚보증을 상상해 도입한 것이다.

상호 빚보증은 논리적으로는 '상호성' 때문에 원천적으로 상계돼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보증능력 없는 보증이기 때문에 있으나마나다.

왜 이런 상호 빚보증이 생겼는가.

첫째는 '담보주의' 대출 관행 탓이다.

담보가 없으면 어떤 좋은 사업에도 대출은 안되고 상상해서 만든 담보라도 있다고 해놓은 다음이면 펑펑 마구 대출하는 관행 말이다.

둘째는 과잉대출 탓이다.

과잉대출도 대출채권임에는 틀림없으나 과잉대출을 회수하지 못하는 책임은 과잉대출을 감행한 은행에 있다.

금융개혁은 과잉대출을 회수하고 담보대출 관행 대신 신용대출 제도를 확립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A사가 B사를 위해 1억원을 지급보증하고 또 B사가 A사를 위해 1억원을 지급보증한다.

C은행은 이런 상호 빚보증을 번연히 알면서 받아들여 A와 B에 각각 1억원씩 대출한다.

C은행이 가진 보증채권은 2억원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두 회사의 상호보증은 자기가 자기를 보증한 것밖엔 아니다.

만일 상호보증이 세회사, 네회사로 중첩되면 각 회사는 자기가 자기를 세번, 네번 스스로 보증한 것밖엔 아니다.

은행이 가진 보증채권 액수는 대출채권액의 세배, 네배에 이르겠지만 조금도 더 튼튼하지 않다.

다만 환상에 불과하다 (이 환상은 주주와 예금주에 대한 배임이고 사기일 수도 있다) . 이 각 1억원 대출이 기왕의 과잉대출 잔고 위에 또 덤을 얹은 것이라고 하자. 두 회사 가운데 어느 한 회사가 부도를 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비록 상호보증의 논리적 무효성을 보류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다른 쪽도 이미 과잉채무를 지고 있으므로 연쇄부도는 불가피하다.

이런 일은 재벌기업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소기업 사이에도 서로 위장 물대 (物代) 어음을 맞교환해 유통시키는 등 상호 빚보증과 똑같은 효과를 내는 금융이 적지 않았다.

연쇄부도는 이렇게 해서 창궐했다.

그렇다면 상호지급보증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상호지급보증을 채권자인 금융기관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대출채권을 보전하는 것에는 아무 해가 없다.

상호 빚보증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 (本來無一物)' 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무일물 (無一物)' 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금융개혁을 이룰 수 없다.

재벌그룹 안의 다른 업종끼리 상호 빚보증을 연말까지 해소시킨다든지, 업종끼리 교환하라든지 하는 말을 들으면 차라리 한가로움을 느끼게 된다.

초점은 직접 각 채무회사의 과다부채를 축소하는데 있다.

뚱뚱한 그림자를 죽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본체의 체중을 줄여야 한다.

이 과제는 시간을 두고 달성해야 한다.

그리고 업종과 기업에 따라 적정 부채비율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은행은 국제결제은행 (BIS) 기준을 달성한다 해도 부채비율이 1천2백% 이상에 이른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5대 재벌의 평균 부채비율을 2백%에 맞추라고 하는 것은 구조개혁이라기보다 기업에 대한 폭력행사에 가까울 따름이다.

강위석(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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