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떠오른 남북경협 청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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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현대그룹 정주영 (鄭周永) 명예회장의 재방북 결과는 전부터 관심을 모았던 김정일 (金正日) 과의 면담 기대를 충족시켰고 그 내용도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드는 계기임에 틀림없다.

북한체제의 특성상 김정일과의 면담은 의례적인 만남이 아니다.

북한에서의 김정일은 절대적이며 결정적인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는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따라서 鄭회장과의 만남의 의미는 단순히 현대의 대북사업에 국한될 수만은 없는 문제로 향후 북한의 정책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간 북한 최고책임자 김정일총비서는 외부세계의 노출을 기피하면서 은둔통치를 계속해 왔다.

94년 7월 김일성 (金日成) 주석 사망 이래 외부인 접견이 11회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김정일이 한국 정부가 허가한 鄭회장 일행과 만났다는 것은 분명 만남의 필요성과 의도성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식량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는 북한의 경제상태는 체제의 존립을 위협하는 한계상황에 다다랐으며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은 유일한 타개책이 개혁과 개방이며 피할 수 없는 길임을 인식하면서도 한편으로 개혁과 개방은 체제붕괴라는 신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개방에서 오는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으로 남한의 민간 대기업과의 경제협력이란 북한식 정경분리정책을 선택한 것이며, 현대와의 빅딜로 현실화했다.

정몽헌 (鄭夢憲) 회장이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현대는 북한으로부터 12개항의 특혜조치를 부여받았으며 북한은 상당한 경제적인 실익을 꾀했다.

현대가 금강산 일대를 장기간 독점 개발.이용하는 대신 2004년까지 6년동안 9억6백만달러를 북한에 지급키로 하는 금강산종합개발계약 체결을 비롯해 9개 경제개발 협력사업과 평양에 실내종합체육관을 건설키로 했다.

또한 현대는 오는 2005년 이후까지 3단계로 나눠 최종적으로 연간 1백50만명 이상의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한다는 계획과 더불어 지불보증이 확보됐을 때 평양에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제3국 건설시장 공동 진출을 위해 투르크메니스탄.리비아 공사의 견적을 검토 중이며 서해안에 약 2천만평 규모로 특구개념의 공단을 10년에 걸쳐 개발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현대가 북한과 합의했다고 발표한 엄청난 경협 청사진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김정일이 鄭회장 일행과의 면담을 통해 경제협력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민간급의 경제협력은 보다 활성화될 것이다.

북한에서 김정일이 鄭회장을 면담했다는 사실은 민간차원의 남북경협을 추진하겠다는 교시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려는 온건세력의 입지가 강화돼 보다 적극성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현대와의 합의를 통해 이익을 챙기며, 기업과의 합의를 남북교류와 협력이라는 여론몰이를 통해 남한 정부를 소외시키려는 기존 전략을 계속 전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현대도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한편 김정일은 직접 鄭회장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를 방문해 면담을 했다.

이에 대해 鄭회장은 회견에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인데 예의를 갖춰 깍듯이 대해줘 무척 고마웠다" 고 밝히고 "金국방위원장이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상당히 있어 보였다" 고 첨가했다.

한마디로 김정일은 최소한 鄭회장 일행에게는 자신에 대해 갖고 있을지도 모를 기존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는데 성공했다.

이번 김정일의 방문면담은 인덕정치를 강조해온 입장에서는 자신을 선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했으며 강경이미지를 희석시키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거두겠다는 이벤트성의 면담방식이었다.

이것은 경협상대자인 현대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계산된 메시지라 하겠다.

여하튼 김정일과의 면담이 성사된 鄭회장의 재방북 결과는 새로운 민족협력시대를 열 수 있는 기회임에 분명하지만 현대가 발표한 방대한 규모의 경제협력이 구체화되기까지는 현재의 남북관계에 변화가 없는한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하겠다.

현재 필요한 것은 경협 실현에 따른 기대보다는 남북당국 관계의 개선을 위한 남북한 모두의 노력이 요구되며 기업도 예외일 수 없다.

강성윤(동국대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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