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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화유산답사기]제2부 12.만폭동의 바위글씨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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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천하명승 금강산이라고 해서 하나같이 다 아름답고 그 모두가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만폭동에 들어와서 나는 놀라움.비통함과 죄스러움을 한없이 느껴야만 했으니 그것은 저 어지러운 바위글씨들 때문이었다.

현대인은 현대인대로, 옛사람은 옛사람대로 바위를 깎고 파내며 글씨와 이름들을 새겨 놓았다.

그 상황이 어느 정도냐 하면 빼어난 금강대 벼랑까지 흰색.붉은색으로 각종 구호들을 깊고 크게 새겼고 만폭동의 그 넓은 너럭바위엔 글씨 쓸 자리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개중에는 남의 이름 위에 자기 이름을 덮어 쓴 것도 있으니 가위 알만하지 않은가.

평소 단양의 사인암 (舍人巖) 이 심해도 보통 심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만폭동에 비하면 깨끗한 편이었다.

보면 볼수록 어지럽고 참담한 심정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요즘 사람은 요즘 사람이라서 그렇다 치고 그래도 겸손과 자기절제, 무엇보다 자연과의 어울림을 생활철학으로 삼았던 옛사람들조차 왜 그랬을까. 나는 인간이 이름 석자 남기고 싶어하는 자기현시욕을 어느 정도는 본능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고 바위가 드문 유럽에서는 고목이나 건물기둥에 새기기도 했다.

뉴욕의 지하철을 온통 낙서로 바른 것도 동기는 비슷한 것이며 1980년대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흑인 화가 바스키아가 아예 낙서를 회화로 끌어들인 것도 이런 인간심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 중 유독 우리 민족이 심해 나 어릴 때는 초등학교 나무 책상에 이름 파놓은 녀석들이 많았는데 요새는 공주 송산리5호분 입구 같은 은밀한 곳에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 이름으로 범벅이 돼있다.

어른들은 한 수 더 떠 아예 국제무대로 진출해 로마의 옛 다리 난간에 민망하게도 한글로 "아무개 여기 다녀간다" 를 새겨놓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전통은 나쁜 것도 계승된다는 원리인가.

그 점도 없지 않다.

식산 (息山) 이만부 (李滿敷.1664~1732) 의 '금강산기' 를 보면 제명 (題名) 각자 (刻字) 의 풍조는 거의 인습적 행태였다.

"만폭동의 혹은 누워 있고, 혹은 서 있는 돌의 앞 뒤 위 아래 할 것 없이 사람 이름을 새겨놓거나 아직 새기지 않고 써놓기만 한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나의 집안 증조부뻘 되는 대사간공과 부윤공,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님 이름도 그 동편에 새겨 있었다. 함께 간 창량노인은 부윤공의 손자이기에 그 아래에 새기고 싶어했으나 쓸만한 빈 틈이 없어 끝내 못 쓰고 말았다…. 그 바위 맞은편에 바위가 있어 일행 세 사람 모두 이름을 써 놓았다. "

이것이 3백년 전 얘기이니 그 뒤는 말해 무얼 하겠는가.

그래서 이미 1백50년 전에 이상수는 '동행산수기' 에서 표굉도 (表宏道) 의 말을 빌려 이 작태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형법 가운데는 산림 속에 숨어들어 나무를 베고 돌을 깨뜨리는 것은 다 일정한 형벌을 가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속된 선비가 명산을 더럽힘에도 불구하고 법이 이를 금하지 않음은 웬일인가. 청산 (靑山) 백석 (白石) 이 무슨 죄가 있다고 까닭없이 그 얼굴에 자자 (刺字) 를 가하고 그 살을 째놓으니 아! 진실로 어질지 못한 일이로구나!" 그러나 금강산의 바위 글씨들이 다 미운 것은 아니다.

금강산을 진실로 사랑한 사람들이 그 자연에 걸맞은 말을 찾아 그에 어울리는 글씨체로 새겨놓은 시구와 계곡의 이름표들은 그야말로 자연과 인문정신의 결합이다.

그 글씨로 인해 한낱 자연풍광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승화된다.

만폭동에 봉래 양사언이 새긴 '봉래풍악 원화동천' , 누군가가 양사언 글씨체로 써놓은 '만폭동' 세글자, 나옹선사가 쓴 것으로 전하는 '천하제일명산' , 그리고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지만 "천개의 바위는 아름다움을 다투고, 만개의 개울물은 흐름을 경쟁한다" 는 멋진 내용을 담은 '천암경수 (千巖競秀) 만학쟁류 (萬壑爭流)' …. 이런 아름다운 전통은 금세기 초까지만 해도 이어졌다.

구한말의 서화가였던 해강 김규진 (金圭鎭.1866~1933) 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할 뜻을 가진 듯 전국 31본사와 주요 말사를 순력하면서 '상왕산 개심사 (象王山 開心寺)' 같은 명작을 남겼는데, 그는 금강산에도 여러 득의 (得意) 의 대작을 새겼다.

1919년 구룡폭에 '미륵불' 을 쓴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33년에는 내금강 향로봉에 글자 하나 크기 4.5m에 전체 길이 20m나 되는 '법기보살' , 그리고 이보다 약간 작은 '천하기절 (天下奇絶)' 을 장하게 새겨 놓았다.

가위 만고의 명작이다.

이런 글씨들을 보면서 나는 처음에는 양봉래 같은 대시인과 나옹 같은 대선사가 왜 시정 (詩情) 넘치고 선미 (禪味) 그윽한 시구나 게송 (偈頌) 을 쓰지 않고 싱겁다면 싱겁게 '천하제일명산' '금강산 만폭동' 이라 하고 말았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만폭동 계류에 휘감겨 이 천하절경에 취하다보니 그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중국 베이징 (北京) 천안문 광장에 있는 혁명역사박물관엔 쑨원 (孫文) 의 방이 복원돼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책상.걸상.탁자 뿐인데 글씨 액자가 하나 걸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읽어보니 '분투 (奮鬪)' 두 글자 뿐이었다.

"열심히 싸우자. " 사실 그 이상의 말이 있을 수 없었다.

백범이 글씨 써 달라면 '애국' 하고 만 것도 같은 맥락의 경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간명한 제명만이, 기특하고 멋진 시구만이 갸륵한 것은 아니다.

서사적 술회의 산문도 그것을 능가할 수 있다.

만폭동에서 보덕암 쪽으로 오르다 보면 백룡담이 나오는데 거기 한쪽 벼랑엔 이런 내용의 글이 잔 글씨로 새겨져 있다.

"산과 물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김은 사람의 보통 심정이로되 나만은 산에 올라 울고 물에 다다라 우노니, 내겐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는 흥취가 없어 이 끝없는 울음이 있단 말인가. 아! 슬프도다. 을축년 가을에 마흔네살 늙은이가 여덟번째로 금강산에 들어와 짓노라. "

누구였을까, 이처럼 처절하리만큼 아름답고 슬픈 사연을 갖고 있던 답사객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혹 남의 슬픔을 즐기는 악취미라고 말할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가 진실로 슬프기만 했으면 이런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니까. 이것은 미적 범주의 하나인 비애미 (悲哀美) 일 뿐이다.

*다음회는 '보덕굴' 편입니다.

글 =유홍준(영남대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통일문화연구소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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