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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 칼럼]이제는 易地思之할 때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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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독일의 적.녹 (赤綠) 연정은 지난 17일 그들의 야당때 주장이었던 원자력발전소 완전폐쇄와 에너지세 인상을 정책으로 삼는데 합의했다.

드디어 여야간에 치열한 논쟁을 벌여 온 국가적 과제가 한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이다.

정권교체의 효용성과 묘미는 바로 이런데 있다.

견해가 다른 정당들이 정책을 치열하게 다투고 그 최종심판을 국민이 내려 국가정책이 대전환을 이룩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정당정치의 전개과정이며 정치발전도 그런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권교체는 국가정책면에서 어떤 대전환을 가져왔으며 그를 통해 어떤 국가.사회적 발전이 이뤄졌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여야의 정치행태를 들여다보자면 과연 정권교체가 있기나 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여당은 과거의 여당을, 야당은 과거의 야당을 쏙 빼 닮았다.

바뀐 것은 얼굴뿐이다.

여나 야나 어차피 정책정당이 아니라 패거리정당이었는데 무슨 정책변화를 기대했느냐고 하면 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선거때의 공약을 찬찬히 비교해 보면 실은 정책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여도, 야도 입지가 바뀜에 따라 자기 편리한 대로 입장을 바꾸고 약속을 어긴 결과 여당은 과거 여당 모습이 되고 야당은 과거의 야당 모습이 됐을 뿐이다.

정부.여당이 정치인 사정을 시작하자 한나라당은 특별검사제를 도입하라고 아우성쳤고 정부.여당은 무슨 소리냐는 듯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하루아침에 입장이 정반대가 된 것이다.

그토록 특검제가 올바른 사정의 담보라면 지난날 한나라당은 왜 특검제 도입을 거부했으며, 지금의 국민회의는 왜 이제 와 특검제 도입을 외면하는가.

지금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는 도청문제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은 이제 와 도청의 폐해를 말하고 통신기밀보호법의 허점을 논하지만 그 법이 언제 제정된 것인가.

지금의 야당인사들이 집권하고 있을 때인 92~93년에 자신들이 주도해 만든 것 아닌가.

또 여당도 그렇다.

과거 도청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현재의 여당인사들이라 할 것인데 야당 주장대로 바로 그들이 집권하고 나서도 불법적인 도청이 다반사로 이뤄진 게 사실이라면 한층 더 부도덕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들 문제뿐만 아니다.

고문문제, 공정한 인사문제, 언론문제, 수사기관의 독립성문제 등등 야당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단순히 야당의 정치공세라고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다.

문제투성이의 법과 제도를 만든 것이 바로 자신이면서 이제 와서 비명을 지르는 야당의 모습도 가관이지만 옛 여당이 만든 법과 제도를 이용해 야의 목을 조르는 여당의 모습도 바람직한 모습은 결코 아니다.

이제는 여야가 고르게 쓴맛을 경험한 셈이다.

수사기관의 정치화.도청.고문.인사편중 등등은 현재의 여당이 야당시절 경험할 만큼 경험해 왔다.

지금의 야당인사들은 쓴맛을 본 기간이 기껏해야 8개월 정도지만 그래도 '이래서는 안되겠다' 는 각성이 들 만큼 경험은 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진정한 역지사지 (易地思之) 의 정신 아래 제기된 문제를 하나하나 합리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데 여야가 합의해야 한다.

입장이 바뀐 여당은 느긋할지 모르지만 민주사회에서 영원한 여당은 없는 것이고 보면 뒷날을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합리적인 개선안 마련에 앞장서야 한다.

도청이나 고문문제 같은 것은 더 이상 논의의 여지도 없는 사안이므로 즉각 여야 합의로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

인사의 공정성을 위한 제도개선문제도 야당의 주장이 실은 현여당의 어제 주장인 만큼 합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특검제도 도입문제도 마찬가지다.

특검제 반대논리도 이론적으로는 수긍할 대목이 많지만 사정기관에 대한 불신은 눈앞 현실이고 역사적 축적이다.

야당정치인들뿐 아니라 국민들도 마찬가지 시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시입법을 통해서라도 특검제를 도입해 일단 사정기관의 공정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오해든 아니든 법의 집행기관이자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검찰 등의 사정기관이 오늘날처럼 불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 기관소속원의 불명예를 넘어 국가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검찰이 씻김굿을 하는 심정으로 한시적인 특검제 도입을 자청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지 모른다.

여야가 하루빨리 역지사지의 개혁에 나서 정권교체의 보람을 국민들이 만끽할 수 있게 해주기를 기대한다.

유승삼(중앙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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