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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쉬어감의 미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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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e-메일 속 글은 조선 정조 때 문신 박윤묵의 ‘수성동에 노닐고서(遊水聲洞記)’였다. 수성동은 인왕산 입구의 계곡이다. 예부터 물이 많아 ‘물소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자하문 근처라고 추측될 뿐 사람 사는 집들이 계곡을 메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다. 그래도 몇 해 전 간송미술관에서 겸재 정선의 ‘수송동’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골짜기에서 흘러나와 집채만 한 바위들을 이리 휘감고 저리 도는 물굽이가 윤묵의 묘사와 하나 다른 게 없다. 비록 실물은 사라졌어도 그림이 있고 글이 남아있으니 선인들의 풍류를 다시 못 즐길 까닭이 없다. 글은 이렇다.

“대개 인왕산 물은 옆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하며 꺾어졌다 다시 흐르기도 한다. 벼랑에 명주 한 폭 걸어놓은 듯한 곳도 있고 수많은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곳도 있다.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는 듯 떨어지기도 하고 푸른 솔숲 사이를 씻어내듯 흐르기도 한다. (…)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 (…) 날리는 포말이 옷을 적시면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혼이 맑아지고 정신이 시원해지며 마음이 편안하고 뜻이 통쾌해진다. (…) 마침내 술에 만취해 즐거움이 극에 달했다. 이에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게 노래하노라.”

말 그대로 뼛속까지 시원해지지 않는가. 딱 200년 전인 1810년 여름 장마가 수십 일이나 계속돼 인왕산 계곡물이 크게 불었다. 당시 인왕산 자락은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역시 중인이었지만 임금의 사랑을 얻어 규장각 서리로 일하던 윤묵은 장맛비가 그치자 친구들과 함께 술 한 통 짊어지고 집 앞 인왕산에 올라 물 구경을 하며 시 돌려 짓는 풍류를 만끽했던 것이다.

오늘날 도심과 맞닿은 천연 피서지가 사라진 것만큼이나 한순간이라도 세상 시름 잊고 화조풍월(花鳥風月) 즐기던 옛 멋이 따라 사라진 게 안타깝다. 그것이 옛사람의 풍류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또 하나의 이유기도 하다. 옛사람들이라고 왜 갈등이 없었겠나. 지체 높은 양반도 아니고 천대받던 중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팍팍했겠나. 쌓이는 스트레스는 또 얼마나 많았겠나 말이다. 그래도 그들은 쉬어 가는 미덕을 알았던 거다. 한걸음도 물러섬 없이 그악스럽게 밀어붙이기보단 잠시 빠져 앉아 머리 식히고 감정 추스르는 게 결국 이득이라는 상생의 지혜를 터득하고 있던 거였다.

게다가 장마 끝 불볕더위가 기승을 더하는 성하(盛夏) 아닌가. 웃는 얼굴 하려야 짜증부터 나는 폭염 아래서는 갈 길 바쁜 나그네도 쉬어 가는 법이다. 아무리 선거운동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땡볕 아래 아스팔트 정치는 안쓰럽기 그지없다. 물도 전기도 끊긴 공장에서 헛된 희망 품으며 주먹 쥐는 건 딱해서 못 보겠다. 쉬러 나온 광장에서 집회시위 보장하라 목청 높이는 건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더 덥게 만든다.

의원님들 휴가도 가고 노조원들 오랜만에 가족과 재회하면서, 분노에 더위에 열 받은 머리와 가슴들을 식혔으면 좋겠다. 제발 8월 한 달 만이라도 반목은 잠시 접고 시원한 맥주 마시면서 차가운 이성 찾아봤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도움이 될 만한 시구가 있다. “산다는 거, 눈 한 번 질끈 감았다 뜨고 나면 정말 별 거 아닌데… 왜? 날마다 가슴에 수북이 돌담을 쌓고 있는지.” 배찬희 시인의 시인데 제목처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와 너 사이 돌담 허무는 일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