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시장가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가 혼자 소주병을 따고 있는데, 간발의 차이를 두고 오십대의 사내가 불쑥 들어와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조창범으로선 일면식도 없는 사내였지만, 초저녁부터 그를 미행했던 윤종갑이었다.

서로가 혼자였다는 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합석이 되었다.

마침 울적한 터에 윤종갑이가 술까지 사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조창범은 시간이 흐르면서 속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말까지 거침없이 쏟아내고 말았다.

영양에서부터 줄곧 한씨네를 뒤쫓고 있었던 윤종갑으로선 십분 짐작하고 있던 내막이었지만, 그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맞장구를 쳤다.

"듣고 보니 조형의 처지가 딱하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러나 장가 못간 늙은 총각이 어디 조형뿐이겠소. 농촌지방에는 조형 같은 총각들이 한둘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던터요. 그런데 말이오. 날이 시퍼런 도끼도 열 번은 찍어야 고목을 쓰러뜨린다 하였소. 한눈에 반했다고 해서 무턱대고 청혼부터 하면 남자에게 기갈이 든 여자라 하더라도 당장은 기겁을 하고 도망치려 할거요. 그게 바로 실패의 원인인데, 결혼부터 하자고 쐐기를 박았으니 그 일행들도 조형을 미친놈으로 볼 수밖에 없지요. "

"내도 처음에는 분위기를 봐가면서 속내를 떠보려고 했습니더. 그런데 여자 편에서 조바심을 내고 이바구가 있으면 퍼뜩하라고 독촉을 해싸이 내가 참을 수가 없었습니더. "

"만의 하나 청혼하리라는 예상은 못했기 때문에 독촉을 한 것이오. 그런 눈치를 모르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았으니 질겁을 할 수밖에. 우리네가 그들과 같은 품목을 팔고 있기 때문에 서로 앙숙이긴 하지만 그네들 속사정은 잘 알고 있어요. 그 여자도 미혼이긴 하지만, 조형이 접근하는 방법이 글렀어요. 꼭 마음에 든다면 방법을 달리 해야할 거요. "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껴?" "우리가 그네들과 상종은 않지만, 같은 장을 찾아다니는 장돌뱅이들이오. 목적을 달성하려면 우리와 동행하는 게 좋을 거요. 조형을 떼놓고 달아나려는 사람들에게 빌붙어서 성가시게 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질 것 아니겠소.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보시오. "

"듣고 보니 옳은 말입니더. 윤선생하고 동행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습니껴?" "그거야 조형 처신할 나름이지. 그 여자에게 조형의 진심을 알리려면 줄기차게 따라 다니는 방법밖에 더 있겠소.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허튼소리는 아니지 않소. "

"내가 윤선생을 따라다녀도 괄시받지는 않을 낍니더. 가근방 장터에서는 나도 심성 한가지는 무던하고 양심 가진 중개인으로 소문났기 때문에 가을철에는 저울 하나만 들고 장에 나와도 겨울 먹을 양식은 벌 수 있습니더. "

"그럼 됐어요. 조형이 처신하는 제도를 봐가면서 내가 중매를 설지 말지 결정하면 되겠지. 그러나 오늘 나하고 나눈 얘기는 우리네들 동패에게는 비밀로 합시다.소문나서 좋을 게 없으니까. 우리 동패들에게 폐단이 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아무나 잡고 중매를 해달라고 성가시게 굴면 그땐 죽도 밥도 안되는 거요. "

신중하게 처신하도록 강다짐을 받다시피해서 일행이 묵고 있는 숙소로 데려갔다.

바람 쐬러 나간다는 윤종갑이가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온 것은 놀랄 것이 못되었지만, 난데없는 중개인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 배완호에게는 탐탁잖은 일이었다.

입에서 풍기는 술냄새부터 속이 뒤집힐 듯이 니글거려서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자다 말고 발딱 일어나서 마당으로 나서는데, 윤종갑이가 뒤따라 나와서 자초지종을 소상하게 늘어놓았다.

덤으로 따라다닐 중개인이라면 손해될 것은 없겠지만, 몸에서 시궁창 냄새가 등천하는 사람과 동패가 되어 다닐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했다.

횡설수설하던 윤종갑이가 방으로 들어간 뒤에 배완호는 혼자 앉아 별빛을 쳐다보며 질끔 눈물 흘렸다.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