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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25>일본에 귀화한 손창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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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호 10면

손창섭(사진)은 서기원·장용학·김성한·오상원·이범선 등과 함께 6·25전쟁 이후 1950년대 한국문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소설가였다. 52년 ‘문예’지에 소설 ‘공휴일’을 발표하면서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한 손창섭은 참혹한 전쟁을 겪은 현대인의 절망스럽고 허무하고 불안한 의식세계를 리얼하게 파헤쳐 주목을 끌었다. 55년 ‘혈서’로 ‘현대문학’ 신인상을, 59년 ‘잉여인간’으로 제4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손창섭은 50년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 문단에 확고한 자리를 구축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나온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하고 해방 후 돌아와 소설을 쓰고 있다’는 정도였다.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는 등 성격이 괴팍하고 폐쇄적이어서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한 데다 아무에게도 자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식도 없이 일본인 부인과 함께 산다는 것도 훨씬 후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손창섭 자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단편적으로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의 지나온 삶의 모습들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61년 ‘신의 희작(戱作)’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신이 만들어낸 우스꽝스러운 작품’이라는 뜻인데 바로 손창섭 자신을 의미한다.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곁들여져 있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그의 ‘자전적 소설’이었다. 서두에서 주인공 S는 ‘삼류작가 손창섭씨’라 밝히고 있다.

‘S가 겨우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커다란 충격을 체험하게 된 것은, 어머니가 모르는 남자와 동침하는 현장을 발견했을 때였다. 열세 살이었다.’
작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할머니·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던 S는 어머니가 그 남자와 함께 자취를 감춰버리자 소학교를 졸업한 뒤 혼자 만주로 가서 1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열다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에 입학한다.

S는 신문 배달, 우유 배달로 힘겹게 고학하지만 반항적인 기질과 저항의식이 몸에 밴 탓에 사사건건 충돌하고 말썽을 부려 중학교를 네 곳이나 옮겨 다닌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니혼대학에 입학한 S는 중학교 시절의 친구 여동생인 지즈코와 관계를 갖게 되고 마침내 동거에 들어간다.

해방되던 무렵 지즈코는 한 아들의 엄마가 돼 있었고,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도저히 식솔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S는 훗날을 기약하고 혼자 귀국한다.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날품팔이, 노숙자, 부랑자로 밑바닥 삶을 살던 S는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란민 대열에 휩쓸려 부산까지 왔다가 어느 비 오는 날, 거리에서 지즈코와 극적으로 해후한다. 지즈코는 S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두 아이를 친정에 맡긴 채 한국에 왔다가 사기만 당하고 식모살이, 여공 등으로 전전하면서 기약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서울에서 살림을 시작한 부부에게 세 번째 아이가 들어서면서 남편의 강요로 아이를 지운 지즈코가 ‘당신은 가엾은 사람이에요, 가엾은 사람’이라며 애처롭게 우는 데서 마무리된다.

몇몇 신문에 연재소설도 집필하는 등 전업작가로서 손창섭의 60년대까지의 삶은 비교적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서는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안양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72년의 어느 날 손창섭은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아내와 함께 홀연히 일본으로 건너가 버렸다. 왜 갑자기 조국을 등져야 했는지 그 까닭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모국어와 문학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독 그의 소설을 좋아했던 한국일보 장기영 사주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76년에는 ‘유맹’을, 78년에는 ‘봉술랑’을 연재하기도 했지만 크게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그것이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래도 한국과 문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미련은 남아 있었던지 그는 꽤 오랫동안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이름도 우에노 마사루(上野昌涉)로 바꾸었다. 지난 2월 한 신문은 87세의 손창섭이 도쿄에 살고 있으며 치매를 앓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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