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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경원 칼럼

민족주의를 거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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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북한은 최근 '우리끼리'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고 하면서 우리의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민족주의는 어떤 것인가? 지난 20세기 후반은 우리에게 기적의 시기였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5000년'역사를 말하지만 그 5000년 가운데 지난 20세기 후반처럼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성장과 발전이 뚜렷했던 시기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시기에 우리 경제는 세계의 맨 밑바닥에서 최상위권으로 뛰어올랐고 정치는 민주화를 이룩함으로써 지금 우리는 선조들이 상상도 못했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 남북 체제경쟁 결과 살펴봐야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젊은이들이 각종 스포츠.예술, 그리고 과학 분야에서 세계 정상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장한 일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랑스럽고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걱정된다.

21세기에도 20세기 후반의 기적은 지속될 수 있을까. 우선 20세기 후반의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유교문화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은 그처럼 우수한 민족이 왜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발전할 수 있었던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우리 민족의 자질도 중요하지만 20세기 후반이 다른 시기와 비교했을 때 무엇이 달랐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20세기 후반은 우리 민족의 분단시대다. 그리고 분단은 우리에게 동족상잔의 비극을 안겨준 동시에 북한의 지시경제와 남한의 시장경제 체제가 경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해 놓았다. 물론 남북한이 현실적으로 지시경제와 시장경제를 충실하게 반영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기본질서의 성격에 있어 남북한은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국가를 운영해온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날 남북한의 비교는 두개의 상반되는 체제에 대한 일종의 실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까. 북한은 '주체'를 내세우면서 모든 것을 '우리식'대로 한다고 주장해 왔고, 남한은 모든 분야에서 미국과 국제사회의 영향력에 노출된 상태에서 살아 왔다.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남한의 태도는 민족적 정체성을 저버린 참으로 수치스러운 자세였다고 할 수 있다면, 북한은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개척해 나간다는 비장한 결의의 표현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민족주의'가 남한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호소력을 갖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족주의 입장에서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파탄에 빠지고 국가경영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북한이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 민족은 그 모든 '고난'을 이긴다는 낭만주의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북한은 남한 사람들이 스스로 민족주의를 내세워 남한과 미국의 관계를 끊음으로써 한국의 성장과 발전의 동력을 무력화하고 한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전략구상을 하고 있다고 본다.

*** 민족주의 앞세워 한.미관계 방해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북한의 민족주의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우리끼리'통일하자는 그들의 선전은 촌스럽고 유치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들 스스로의 마음에 달렸다. 지난 반세기의 발전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끼리' '우리식으로' 살기를 고집함으로써 오늘날 북한과 같은 처지에 놓이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에 달렸다.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독재를 강요하지도 않으며 자유와 인권을 박탈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동족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혼자서 호의호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행복과 존엄을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과,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주의는 거부할 줄 아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

김경원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