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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조(兆)의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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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조(兆)는 1에 0이 몇개나 붙을까. 반사적으로 12개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조는 일상 생활에선 별로 쓸 일이 없는 단위다. 로또 1등 당첨금도 수십억원이 보통이다.

너무 큰 단위이기 때문일까. 몇 조원, 몇 십조원의 중량감을 제대로 실감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 듯하다. 외환위기 때 부실 대기업이 쓰러지면서 남은 빚, 은행 구조조정 하느라 들어간 공적자금이 보통 조 단위였다. 당시엔 너도나도 몇 조원을 남의 집 개이름 부르듯 하는 분위기였다.

일본도 구조조정을 하면서 거액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경험이 있다. 일본의 보통사람들도 몇 조엔이 얼마나 큰 돈인지 실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가 낸 세금으로 이뤄진 돈인데도 말이다. 이같이 마비된 감각을 풀어주려고 한 사람이 바로 작가 무라카미 류(村上龍)다.

그는 '그 돈으로 무엇을 살 수 있었나' 라는 책에서 주로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한 사업들의 비용을 예시했다. 이를 통해 조 단위의 공적자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기 쉽게 설명했다.

예컨대 세계 각지에 깔려 있는 약 1억1000만개의 대인지뢰를 모두 제거하는 데 드는 돈은 약 40조원으로 제시됐다. 개발도상국 어린이 전원에게 기초교육을 시키는 데는 연간 8조5000억원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또 비타민 부족으로 실명 위기에 빠진 각국의 빈곤 아동들을 구하는 데 드는 돈은 약 200억원으로 계산됐다.

이밖에 전 세계 어린이에게 소아마비.결핵 등의 백신을 5회분 주사하는 데는 약 3000억원, 길거리에서 나뒹구는 개도국의 빈곤 아동들에게 모포 한장씩 나눠주는 사업엔 7조5000억원이 든다고 했다. 또 저개발국의 주민들에게 위생적인 식수원을 제공하는 데는 2조3000억원,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정글 조사.복원사업엔 불과 2600억원이면 된다고도 했다.

무라카미는 이처럼 인류애적인 사업과 일본의 거품경제 시절의 '돈 잔치'를 대비시켰다. 이것만으로도 통렬한 비판이 됐다.

이런 사례를 수도 이전 비용으로 계산된 45조원과 비교하면 둔감해진 금전 감각이 다소 살아나지 않을까. 다만 훗날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나'라는 말은 나오지 않기 바란다.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