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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인터뷰 - 좌우 극한 대결, 해법을 묻다 ③ 이상준 골든브릿지금융그룹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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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상준 골든브릿지금융그룹 회장은 “지금의 기성세대는 죽도록 고생한 부모 세대가 이룩해 놓은 과실을 따먹어 놓고 다음 세대의 몫까지 가로채려는 것 같다”며 “좌우 이념 대결이 문제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앞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김태성 기자]


-어린 시절엔 집안 형편이 어땠습니까.

“제가 9남매 중 밑에서 세 번째인데 우리 집은 산동네를 전전하는 전형적인 도시빈민이었어요. 고등학교 갈 때쯤 집안이 완전히 몰락했어요. 제가 서른아홉에 처음 집을 샀는데 주민등록초본을 보니까 그때까지 39번을 옮겨 다녔더라고요.”

-학생운동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우연히 운동권 지하서클에 들어갔어요. ‘신정야학’이라고 예전에 김민기씨 등이 관여했던 단체죠. 초창기엔 리버럴한 지식인 운동이었죠. 한데 77학번 때부터 체제전복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했어요. 저도 그 영향을 받았죠. 러시아 혁명처럼 ‘나로드니키 운동’이 ‘볼셰비키 전위당’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대학을 다닌 거죠. 전 3학년 때 공장에 갔어요. 80년 5·17 터지고 휴교령 떨어진 뒤 부산으로 내려갔죠.”

-위장취업했었나요.

“제가 주민등록증 위조 기술자였어요. 한 20건 정도 했던 것 같네요. 목공으로 봉인 만들어서 사진에 압인하고, 손재주가 있어서 그걸로 밥 벌어먹어도 될 만큼 기술이 좋았어요. 눈으로 주민증 확인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속이기도 쉬웠고요.”

-언제까지 공장에 있었습니까.

“87년 노동자 대파업 이전까지 공장과 그 주변에 있었어요. 중간에 군대도 다녀오고. 여기저기 공장 다니며 기술을 익히고 공부해서 금형공 자격증도 땄죠. 기술이 있어야 노동자들한테 ‘말발’이 먹혀요. 견습공이 선동하면 누가 듣나요. 85년도 구로연대파업 때 집사람도 구속됐죠. 여기저기 노동자 조직 만들고, 배후 조종하는 일을 했어요. 5년간 지하에서 노동자로 있다가 다음엔 반(半) 공개로 노동자 의식교육을 했고 87년 이후에는 수면 위로 나와서 합법적 노조 활동을 했죠. 그때 전국보험노조연맹에 들어가 홍보부장도 했어요.”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92년 대선 이후 노동운동 그만뒀는데 왜 그랬습니까.

“그때 사회주의가 망했잖아요. 운동권은 아노미였어요. 그럴수록 거꾸로 가자는 강경파도 있었지만 전 달리 생각했어요. 게다가 김영삼 정부는 어쨌든 투표로 뽑혔으니 ‘군부파쇼정권’이 아니잖아요. 그동안 저항은 많이 했으니 이젠 ‘시장’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자본주의는 시장으로 움직이니까 강해요. 운동권이 정권을 잡아도 사람들 먹여 살리려면 그게 다 돈 이야기잖아요. 우리(운동권)는 돈을 벌어본 적이 없고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죠.”

-그래서 뭘 했습니까.

“당시 30대 중반이니까 취직이 안 돼요. 가락동에서 식자재 납품업, 변호사 사무장 등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그런데 다 망했죠. 여섯 번째로 한 게 건물 철거업인데 그건 잘 되다가 97년 위환위기 때 또 망했어요. 그때 경영자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알게 됐어요. 자본가가 센 이유가 있더라고요.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다 걸거든요.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로.”

-사업에 망하면서 자본가의 힘을 알게 됐다고요.

“빚은 제가 떠안고 남은 장비는 종업원들에게 전부 넘겼어요. 중소 자영업자도 자본가라면 자본가지만 파산하면 가족까지 해체됩니다. 노숙자로 전락하는 것도 시간 문제고요. 우리 사회의 먹이사슬 구조에서 수백만이 넘는 영세 자영업자는 다 그 위험에 노출돼 있어요. 사업한답시고 자기가 주인이라 노동력 값도 못 받고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된 사람들이죠. 저도 망한 뒤 다 넘기고 혼자 노숙자로 살면서 공사판 ‘노가다’를 한 1년 했어요.”

-그러다 대학 후배인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을 만나 의원 보좌관이 됐는데 뭘 느꼈습니까.

“만날 반정부 투쟁하고 체제전복을 꿈꾸다가 나라에서 주는 월급을 받게 됐는데 국회 가보니 국가라는 게 간단한 게 아니더라고요. 국가 조직 하나하나의 역할과 기능에도 나름 의미와 역사·철학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운동권은 그중 일부분에 저항했지만 한꺼번에 뒤집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몰랐어요. 운동권 시절엔 공무원 손가락질 했는데 그들을 무시할 게 아니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좌파 투사가 국회에 가서 보수적으로 변한 거네요.

“국회에서 법률의 입안부터 통과까지 실무를 다 해 봤는데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수많은 이해 관계자와 프로세스를 거쳐야 되고, 그게 또 시장에서 상황이 바뀌죠. 장단기 영향 등 고려해야 할 게 많아요. 구호와 주장으로 끝나는 게 아니죠. 정권을 잡으면 이건 실천과 생활의 문제입니다. 정책을 잘못 집행하면 자기가 이익을 주려던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봐요. 시장논리와 동떨어진 서민을 위한 부동산 정책이 서민을 죽이는 걸로 나타나죠.”

-노무현 정부 때의 주택정책을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지지 세력마저 정치적 적대세력으로 돌렸죠. 갑근세를 안 내본 사람들이 노동자·서민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건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에요. 구호나 외치던 관성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유리돼 갔던 겁니다.”

-지금의 노동운동은 어떻게 봅니까.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노동운동을 이야기하는 순간 운동은 타락합니다. 청년 실업자나 산업 예비군을 보세요. 바로 그 위에 외국인 노동자와 비정규직이 있고, 그 위에 하청업자, 정규직 노동자, 재벌기업 노동자들이 있어요.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구조죠. 이런 구조인데 최상층 노동자들이 노동운동 하니까 따라오라고요? 이런 아이러니컬한 노동운동이 정상적일 수 없죠.”

-현재의 노동 운동이 노동 착취구조라는 겁니까.

“자본가들 사이에 재벌기업, 중소기업, 하청기업 하는 식으로 착취구조가 있는 것처럼 노동자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의 노동운동은 미래의 노동력이 시장에 진입하는 걸 막고 있어요. 광범한 젊은 노동력이 놀고 있잖아요. 이들을 첨단산업으로 돌리거나 해외에 진출하게 해야죠. 그래야 우리 세대가 노후에 연금이라도 받을 텐데 말이죠. 자기 자리를 철밥통으로 만들어 노동력 교체가 되지 않아요. 노동운동이 그런 식으로 보수화된 거죠.”

-실업문제 해결이 좌우 가릴 것 없이 핵심 과제라는 거군요.

“사회는 시장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시장엔 ‘경쟁 바이러스’가 존재하지요. 직장에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시장에 나오면 소비자로서 싸고 좋은 걸 사려고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기업 간, 노동력 간, 세대 간의 경쟁도 있는 거지요. 지금 300만 청년 실업자와 수백만 영세 자영업자들, 또 그 가족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에요. 그들의 목소리가 개별화됐기 때문에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촛불 같은 게 또 터지면 전부 나옵니다. 지금의 좌우 논쟁은 정말 귀족적이죠. 생활 전선에 있는 대중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들이죠.”

-왜 이리 본질과 동떨어진 논쟁이 많습니까.

“제가 노동운동을 그만둔 이유도 그래서인데요,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것 같아요. 자신은 항상 지고지순하고 가치 중립적이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단의 사람들. 그런 유전자가 있는 것 같아요. 작가가 많은 나라는 성장하고 비평가가 많은 나라는 망해요. 우리 사회엔 평론가가 너무 많아요.”

-어떤 해법이 있습니까.

“좌든 우든 모든 걸 미래지향적이고 구체적으로 해야 해요. 뭔가 대안을 만들어 내려고 한 길을 걷고 꾸준히 준비하는 사람들을 높이 쳐 줘야 해요. 전문가는 대안을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대안 한 번 내놓고 마는 게 아니라 성공할 때까지 끝까지 가야 해요. 지금은 먹고사는 현안을 해결하는 게 좌우 이념논쟁보다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못 주면 창업이라도 시켜야죠. 지금처럼 IT로 무장한 젊은이들에게 대대적인 투자를 해서 해외로 진출시켜야죠. 좁은 나라 안에서 싸워봐야 한계가 있어요. 우리는 축적된 기술도 있겠다, 에너지도 있겠다, 못할 게 없거든요.”

-좌우 대립이 한심하다는 거군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낸 결론이 없잖아요. 어젠다만 잔뜩 내놓고 대안은 없어요. 일반 회사 같았으면 문제만 떠들어대고 성과가 없는 사원은 잘려요. 한국 정치는 고객(국민)을 위한 시장이 아닌 것 같아요.”

-해외에 많이 다니시는데 해외에 나가면 길이 보입니까.

“한국 사람들이 잘하는 게 있는데 싫증 잘내는 거예요. 우리처럼 변덕 심한 민족이 없어요. 신제품 하나 만들고 나면 그 제품 다른 나라가 따라오기 전에 또 다른 제품을 만들어요. 그런 속도감을 다른 나라는 못 따라와요. 한국인은 집단적 작업보다 개별적으로 뛸 때 더 능력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그걸 국가가 시스템과 제도로 뒷받침해야죠.”

-골든브릿지에서도 그렇게 합니까.

“전 신입사원들한테 한국서 살지 말라고 해요. ‘베트남 가면 32세짜리가 사장이다. 너희는 한국선 40대 중반에도 부장도 안 된다. 그러니 해외 지사 나가서 승부해라.’ 그럼 젊은 친구들 서로 나가겠다고 해요. 지금 세대는 경제 노마드(유목민)로 해외 진출을 해야 해요.”

-정치권엔 뭘 바랍니까.

“너무 단기적인 처방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대중에 영합해 성공한 정책이 없어요. 국책 사업은 국가의 미래 경제에 미치는 영향, 다음 정권과 세대에 미치는 효과를 고려해야죠.”

대담=김종혁 문화스포츠 에디터 , 사진=김태성 기자
정리=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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