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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은 나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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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좌우간 술자리 집중력 하나는 대단해서 회식 자리에 가서는 휴대전화도 만지작거리지 않는다. 물론 1차에 적당히 자리를 떠주는 센스 또한 가져 본 적이 없다. 반드시 2차 노래방까지 가서 춤과 노래로 마무리를 짓는다. 패션지에서는 최신곡에 도전하는 걸로, 주부지에서는 최신 트로트곡을 마스터해 잡지 성격에 따른 맞춤 가무를 자랑하기도 했다.

마감 있는 직종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 속을 태우게 마련이라 스트레스가 쌓인다. 나는 술과 노래로 푸는 타입이고, 운동으로 푸는 사람, 먹는 걸로 푸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자잘하게 병나는 걸로 푸는 사람도 봤다. 어떤 식으로든 쌓인 걸 풀어내는 건 일을 잘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통과의례가 아닐까. 늘 같은 방식의 술자리에 식상해서 변화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술에 약한 후배들의 압력에 밀려 순한 술로 시작해 겁 없이 마시다가 고기 값보다 술 값이 더 많이 나온 적도 있다. 트렌드에 맞춰 와인바에서 우아한 회식을 하기도 했는데 좌르르 앉아서 소주잔 비워 가는 일체감을 맛보기 어려워 한 번으로 ‘쫑’ 냈다. 영화 보고 커피 마시는 2단계 회식에도 도전해 봤는데 다음 날 숙취 걱정은 없지만 밋밋하고 싱거웠다. 결국 열흘 이상의 야근을 통해 300쪽짜리 잡지를 만든 뒤의 회식이란 ‘생산 패턴에 걸맞은 하드한 방식이어야 한다’는 소신이 생겼고, 우리 본부 회식은 ‘소폭’에 이은 노래방 코스를 벗어나지 않는다. 여자 상사이니 럭셔리하고 아기자기한 회식을 기대하는 후배들도 있지만 카드 쥔 사람의 이 같은 회식론을 누가 이기랴.

물론 잡지사 회식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억지로 권하면 영락없이 구세대 취급을 받는다. 잡지 DNA를 가진 사람은 ‘핫’하기보다 ‘쿨’해야 한다지 않던가. 솔직히 트렌드세터가 군인처럼 앉아 술잔을 비워 가는 게 말이나 되나. 알면서도 나는 권하고, 돌리고, 붙잡는다. 한 달에 한 번 팀명을 외치며 술잔을 부딪치는 게 쌓인 스트레스를 속전속결로 비워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익숙해지면 집에서도 익숙해진다. 결혼 초에는 취해서 들어오는 마누라에게 꼬장꼬장한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홍고추 넣고 시원한 콩나물국을 끓여 주던 남편이지만 요즘엔 잔소리도 콩나물국도 없다. 대신 다음 날 조금 늦게 출근해 컴퓨터를 켜면 메신저에 이 같은 멘트가 떠 있다. “하이, 마누라! 시원하게 노셨나?”

이숙은‘HEREN’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