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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이란 단어는 아예 입에 담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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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경북 김천 출생, 한양대 기계공학과 졸업, 금성사 이사·LG전자 디지털어플라이언스 사업본부장·LG전자 부회장·LG 부회장 현 한국전력공사 사장

포브스코리아6월 23일 새벽 1시 전주에 있는 집에서 막 잠자리에 들려던 한국전력 중부건설처 신태우(49) 부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본사 인사팀장이었다.

김쌍수 한전 사장의 마인드 개혁

“승진 심사위원으로 선정됐다. 오전 6시까지 한전 연수원인 서울 공릉동 켑코(KEPCO·한전) 아카데미로 오라. 심사위원이 됐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연수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인사팀 직원이 비디오 캠코더를 들고 따라붙었다. 혹시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지 않는지 감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다른 인사팀 직원이 휴대전화를 달라고 했다.

승진 심사를 하는 동안 외부와 통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신 부장은 “좀 살벌하기도 했고, 마치 대입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고 말했다.

연수원에는 신 부장처럼 한밤중에 심사위원이 됐다고 통보 받은 30명이 모였다. 공정한 승진 심사를 위해 차장급 이상 중에서 컴퓨터가 무작위로 뽑아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부장급 중에서 처·실장으로 승진할 사람을 뽑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에 배치됐다.

혹시 벽을 두들겨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까 봐 몇 칸씩 떨어진 방에 들어가게 했다. 방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승진 대상자의 인사 관련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깔린 노트북이었다. 심사 프로그램 말고는 e메일도 쓰지 못하도록 해놨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한 것이다.

식사는 연수원 식당 아주머니들이 식판에 담아 나르고, 먹은 뒤에는 문 밖에 내놓게 했다. 화장실에 갈 때는 복도에서 대기하던 감사실·인사팀 직원이 따라붙었다. 다른 심사위원과 얘기를 나누지 않는지 감시하는 것이었다. 오후 6시까지 꼬박 12시간 동안 심사가 이어졌다.

신 부장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승진 심사인데, 분위기까지 삼엄해 공정하게 해야겠다는 부담이 심했다”고 말했다. 한전이 심사위원을 무작위로 뽑고, 철통 보안 속에서 승진 심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다. 전에는 본사 부장급 이상이 주로 심사를 맡아 “평소에 누구 누구와 친해 두면 승진에 유리하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다.

그러던 것을 최대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제도를 확 바꾼 것이다. 지난해 8월 부임한 김쌍수(64) 한전 사장의 ‘인사 개혁’이다. 이런 인사 실험은 올 초에 시작됐다. 부임 후 첫 처·실장 인사를 한 게 지난 1월의 일이다. 일요일이었던 11일 한전의 고위 간부 54명은 한밤중에 인사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 오전 8시까지 본사 강당에 모이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처장, 실장 등 고위 간부 보직 인사를 앞두고 있던 때. “혹시 내가 어디 발령 받았느냐”는 물음엔 “모른다”는 답만 돌아왔다. 다음날 강당에 모인 간부들에게 김쌍수 사장이 임명장을 줬다. 보직이 정해진 것이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같이 일할 팀장을 직접 고르라고 했다. 강당엔 인사 자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컴퓨터 54대가 놓여 있었다. 팀장급들의 희망 부서와 경력 등을 살펴 그날 밤 2시30분께 1019명 팀장이 정해졌다.

이틀 만에 간부 1073명의 인사가 끝났다. 인사 때마다 곳곳에서 청탁이 들어온다는 얘기에 김 사장이 이런 번개 작전을 펼친 것. 한전 관계자는 “예전 같으면 한 달 걸릴 간부 인사가 초고속으로 처리됐다”며 “인사 청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청탁 끼어들 여지 없는 ‘번개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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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간부 인사 과정에서 팀장급 이상 40%가 물갈이 됐다. 김 사장은 인사 한 달 뒤 간부들과의 토론회에서 “청탁이나 연줄이 통하지 않는 인사, 능력에 따른 공정한 인사 제도가 뿌리내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LG전자 부회장으로서 ‘혁신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은 김 사장은 사실 ‘공기업 개혁’의 사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한전에 입성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지식경제부 고위 관계자는 “최대 공기업인 한전에 효율을 최우선으로 따지는 민간 기업의 사고 방식을 뿌리내릴 인물이 필요했다”며 “한사코 고사하는 김 사장을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아니라 십고초려(十顧草廬) 끝에 모셨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뚝심으로 서서히 개혁을 밀어붙였다. 중복된 조직을 개편하면서 군살을 덜어냈다. 24처(실) 89팀을 21처(실) 70팀으로 줄였다. 27개 사업본부·지사는 14개로 통합했다.

이 과정에서 인력 5845명이 줄었다. TDR(Tear Down & Redesign)란 조직도 만들어 내로라하는 인재 350명을 배치했다.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파고 든 뒤(Tear Down) 새로운 아이디어로 재구성해(Redesign) 효율을 높이는 조직이다. 예컨대 ‘리포트 123’ 같은 게 TDR팀의 작품이다.

보고서를 길게 늘여 만들지 말고 실적은 1장, 계획은 2장, 첨부 문서까지 있는 것은 3장 이내로 만든다는 것이다. 워낙 큰 회사라 종이 값만 지난해 113억 원을 아꼈다. 이런 식으로 지난해 TDR팀이 절감한 비용이 1117억 원에 이른다. 이렇게 외형적인 개혁도 했지만, 김 사장이 정말 추진한 건 따로 있었다.

‘소프트웨어적 개혁’이랄까, 직원들의 마인드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금기 사항을 만들었다. ‘공기업’이란 단어를 입에 담지 말라는 것이다. ‘한전은 공기업이니까’라는 생각이 효율화와 개혁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라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김 사장은 영업 직원들에게 “독하다는 소리를 들어라”고 입이 닳도록 주문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업이 문 닫을 징조를 제일 먼저 아는 게 한전이다. 당장 공장 전기 사용량이 줄지 않나. 그런데 정작 기업이 넘어가면 채권단이 다 자기 몫 챙긴 뒤에야 밀린 전기요금을 받는다. 이게 말이 되는가. 먼저 받아내라.”

“떼법이 통하지 않게 하라”고도 했다. 전기요금을 못 내겠다고 무작정 우기는 사람이나 업소에 굴하지 말라는 의미다. 최고경영자의 이런 지시 때문인지 최근 한전의 전기요금 징수율은 종전 95%에서 96%로 1%포인트 올랐다고 한다. ‘겨우 1%’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난해 한전 매출이 31조5000억 원이었으니, 1%면 3150억 원을 더 걷어들인다는 얘기다. 또 한전의 전기요금 징수율이 1%포인트 오르면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1%포인트 사라지게 된다.

‘혁신 10계명’을 새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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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사장은 또 ‘혁신 10계명’이란 것을 정해 직원들이 가슴에 새기도록 했다. ‘No 없는 도전’ ‘한 방에 끝내자’ ‘실천하는 것이 힘이다’ ‘조직을 파괴하라’ ‘나 아닌 우리’ ‘자원은 유한하지만 지식은 무한하다’ 등이다.

‘5% 개선은 불가능해도 30% 혁신은 가능하다’는 것도 10계명 중 하나다. 효율을 5%만 올리겠다고 목표를 정하면 기존의 제도를 그대로 놓고 조금만 고치려다가 결국 실패하지만, 30% 효율화를 달성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뜯어고치는 데 나서게 돼 결국 성공한다는 지론이다.

사안을 밑바닥까지 분해해 들여다보는 ‘TDR’도 바로 ‘5% 불가능, 30% 가능론’에서 나온 것이다. 소프트웨어적 개혁과 관련 김 사장은 현재 “맨 파워가 많이 개선됐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라고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에서는 미래 먹을거리를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고 있다.

해외 사업으로 발을 넓히고 있다. 한전 관계자에 따르면 김 사장은 해외 사업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모름지기 기업은 1년에 10%는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전력 산업은 국내 시장만 갖고는 5%도 성장하기 어렵다. 당연히 해외로 나가야 한다.”

성과도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25억 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라빅 화력발전 사업을, 올 3월에는 역시 25억 달러짜리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발하슈 화력발전 사업을 따냈다. 발전소를 지은 뒤 라빅은 20년간, 발하슈는 25년간 한전이 운영을 해 주는 사업이다.

해외 자원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우라늄, 석탄을 확보해 연료 값이 많이 뛰더라도 국내 전기요금은 영향을 덜 받도록 하려는 목적이다. 현재 7.2%인 유연탄 자주개발률과 0%인 우라늄 자주개발률을 2012년까지 모두 30%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자주개발률이란 한전이 한 해 쓰는 연료 중 몇 %를 해외 소유 광산에서 생산하는가 하는 것이다.

한전은 지난해 5000억 원이었던 해외 사업 매출을 2020년에는 27조 원으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통해 2020년에는 총 매출 85조 원인 세계 5위 전력 회사가 되겠다는 포부다.

한전은 이 같은 비전을 7월 1일 창립 48주년 기념 행사에서 공식 발표했다. 2020년은 임기 3년인 김쌍수 사장이 연임을 한다고 해도 물러난 한참 뒤의 일이다. 김 사장이 한전 내부에 서서히 심어가고 있는 혁신 마인드가 ‘2020년 글로벌 5대 전력 회사’라는 장기 비전을 달성하는 원동력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글 권혁주 중앙일보 경제부문 기자·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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