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타계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세계영화계는 인간실존과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고전적 형식에 담아 표현했던 그의 죽음을 '거장의 시대의 종언' 내지 '영화문화의 한 시기를 마감'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추모 분위기 속에서 구로사와의 친구인 이치가와 곤 감독 (82) 이 구로사와의 유작 시나리오를 영화화하기로 해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이치가와 곤은 56년에 만든 '버마의 하프' 가 그 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해외에 알려진 일본의 대표적 감독. 특히 작품의 근저에 강한 휴머니즘 정신이 깔려있고 80이 넘은 나이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등에서 구로사와와 곧잘 비견되곤 했다.
65년작 '도쿄올림픽' 은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경지를 펼쳐보인 명작으로 남아있다.
'실락원' 으로 인기절정인 야쿠쇼 코지 (42)가 주연을 맡아 이달 말 쵤영에 들어가게 될 영화의 시나리오는 구로사와가 69년에 쓴 것. 당시 이치가와는 작고한 고바야시 마사키.기노시타 게이스케 (85) 등 일본의 베테랑 감독들과 함께 '네 기사의 모임 (四騎の會)' 을 결성했다.
표면적으로는 '일본영화의 부흥' 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구로사와를 격려하고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로사와는 68년 미.일 합작영화인 '도라!도라!도라!' 를 연출하던 도중 20세기폭스사로부터 감독직에서 해임되는 굴욕을 맛 본 이후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어 70년에는 구로사와의 첫 컬러영화로 빈민가의 모습을 그린 '도데스카덴' 마저 흥행에 실패하자 마침내 71년 자살을 기도한다) .
이번 시나리오는 바로 '네기사의 모임' 의 동료들이 발의해 구로사와에게 맡겼던 것이다.
야마모토슈고로 (山本周五郎) 의 '공무원의 일기' 가 원작으로 구로사와는 이 시나리오에 '방탕한 자의 가면'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치가와 감독은 "구로사와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쓴 시나리오인 만큼 무척 애정이 간다" 며 "그의 31번째 작품으로 바치고 싶다" 고 말했다.
이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