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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일주‘집단가출호’2차 항해] 태초의 모습 그대로 뛰어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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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안면도 앞 바다에 있는 초도 부근에서 선원들이 MOB(Man Over Board·항해 중 물에 빠지는 사고) 구조 훈련을 하고 있다. [이정식 작가]

“갈매기다!”

말린 생선처럼 이물에 늘어져 있던 바우맨 김진원(37)이 뜬금없이 소리를 질렀다.

대체 바다에 갈매기가 있는 게 무슨 경천동지할 일일까.

틸러(키)를 잡은 허영만 선장과, 없는 바람을 그러모으기 위해 집요하게 돛줄을 조정하고 있던 정성안 외엔 거의 노숙 자세로 갑판에 뒹굴던 크루들이 황당하다는 시선을 쏟아냈다.

“갈매기가 보이면 섬이 가깝다는 뜻이잖아요.” 머쓱해진 바우맨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갈매기의 출현을 해석하는 순간, 크루들은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하늘을 살폈다. 긴 항해에서 바다는 사막이고, 섬은 오아시스다.

바우맨의 말은 맞았다. 갈매기가 나타난 지 한 시간쯤 뒤 오아시스처럼 초록색으로 빛나는 격렬비열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3일, 집단가출호의 두 번째 항해는 출발부터 진을 뺐다.

전곡항에서 격렬비열도까지는 120㎞가 넘는다. 바람은 약했고 항해의 최대 적 안개가 자욱했다. 새벽 4시에 모인 크루들은 연방 하품을 해댔다. 게다가 해가 뜨자 기온이 급상승했다. 이른 아침임에도 바닷물을 끓여 버릴 기세다. 선실에선 요리 담당 김은광(41)이 팥죽 같은 땀을 흘렸다.

바람은 완전히 잤다. 정오를 넘겨 태양이 본격적으로 작열하자 크루들은 그늘을 찾아 헤매 다녔다. 점심 식사 후 과일 간식으로 기운을 차리는 듯했으나 가도가도 끝 없는 수평선에 먼바다 특유의 너울이 가세, 선원 상당수가 멀미로 쓰러졌다. 적도 부근에 있다는 돌드럼스(doldrums·열대무풍지대)가 아마 이런 식일 것이었다.

출항 12시간 후 해질 녘에야 녹초가 되어 북격렬비열도에 닻을 내렸다. 파도가 거세 섬 주위 가파른 바위벽에 야영장비와 크루들을 상륙시키는 일은 신경이 몹시 곤두서는 작업이었다. 갈매기들이 영역 침범을 항의하듯 울어댔다. 섬 꼭대기에는 기상관측장비와 등대가 있으나 몇 년 전 등대지기가 떠나 무인도가 됐다.

놀래미와 참돔 몇 마리를 낚아 저녁을 먹는 동안 달이 떠올랐고 등대의 화려한 레이저쇼 속에 북격렬비열도의 밤은 깊어갔다.

새벽에 집어등을 켠 어선 한 척이 섬 앞에 그물을 치고 돌아갔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라는 시(詩)가 있다. 하지만 7월의 격렬비열도에는 음악 같은 눈 대신 아침부터 격렬하게 뜨거운 햇살이 내렸다. 크루들이 갯바위를 다이빙대 삼아 차고 맑은 바다에 나체로 뛰어들어 몸을 식혔다.

격렬비열도 동쪽에 눈부신 자태로 늘어선 석도, 우배도, 궁시도를 감상하며 남쪽으로 비팅(바람이 불어오는 각도에 최대한 근사치로 전진하는 항해법)해 내려갔다. 위도상 대천쯤까지 남하한 뒤 남서풍을 뒤로 받아 스피네커(순풍용 돛)를 펼친다. 시속 7노트를 넘나들자 크루들은 생기를 되찾았다.

아시안게임 요트 금메달리스트 정성안(39·여수시청)의 열정적인 세일링 강의까지 이어지자 어제와는 180도 다른 분위기다. 세일링에 집중한 덕분에 멀미하는 사람도 없었다. 9시간 가까이 달려 오후 7시30분, 공처럼 둥글고 단단한 자갈로 유명한 내파수도에 상륙했으나 야영할 곳이 마땅찮아 외도로 발길을 돌렸다.

끼니가 늦어져 허기진 크루들은 생라면을 깨 먹었다. 허 선장은 “이러다 선상 반란이 일어나겠다”며 특식을 제안했다. 외도 앞바다에서 만난 어선으로부터 씨알 굵은 참돔 7마리를 사 방파제에 둘러앉아 소박하지만 화려한 만찬을 즐겼다.

다음 날 보령 오천항으로 향하는 뱃길 초입엔 군데군데 바다 쓰레기 더미와 함께 적조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2년 전 일어난 기름 유출사고의 흔적은 대부분 지워졌으나 바다를 오염시키는 것이 단지 기름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번 항해에서 단 한 점의 쓰레기도 버리지 않는 클린 세일링(Clean Sailing)을 모토로 삼은 우리들은 몇 개의 PET병을 건지는 데 성공했으나 손이 닿지 않는 쓰레기들은 안타깝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5일 오후 2시, 천수만을 깊게 파고든 오천항에 집단가출호를 정박시킴으로써 2차 항해를 마쳤다. 다음 항해는 오천항에서 외연도, 어청도를 짚어나가 격포로 들어가게 된다.

송철웅(레저전문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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