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한 맛’이란 게 있다. 어느 나라 말로도 번역이 안 될 ‘우리 맛’이다. 이북 실향민 부모를 둔 나는 뼈저리게 이 맛을 숭배한다.
내게 그 ‘쨍한 맛’을 처음 선물한 분들은 조부모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참 성가시게 했다. 추운 겨울이면 할머니는 늘 국수를 내오라는 할아버지와 티격태격했다. 하지만 투덜거림도 잠시, 할머니는 팥밥을 창밖에 내어 놓아 찬밥을 만들고 살얼음 살짝 언 동치미 국물과 김치 국물을 적당히 섞어 참기름·깨소금을 넣은 김치말이 국수를 해 주셨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매년 동두천 지나 경기도 연천군 초성리로 성묘를 갈 때마다 의정부 끝자락 어딘가에 있던 ‘의정부 평양면옥’에서 내 생애 두 번째 ‘쨍한 맛’을 만났다. 그 후 수십 년이 지났지만 제육ㆍ편육과 함께 이곳의 평양냉면은 아직도 내 입맛을 사로잡는다.
이후 그 쨍한 맛은 의정부 평양면옥과 사돈지간이라는 서울의 ‘필동면옥’ ‘을지면옥’에서 계속된다. 최근 강남구 신사동에 문을 연 서울판 ‘의정부 평양면옥’(본점 사장의 딸이 운영 중이다)은 강남에 사는 나로서는 황송하도록 고맙기까지 하다. 아버지 말씀이 “육수는 돼지고기ㆍ쇠고기ㆍ닭고기(또는 꿩고기)의 조화다” 하셨는데 아직은 이 조화로운 육수를 먹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명동 중앙극장 앞 ‘평래옥’, 남대문 시장의 ‘부원면옥’은 또 다른 쨍한 맛을 보여 주니 내게는 반가운 곳이다.
우리 집안에는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냉면 맛있게 먹는 비법’이 있다. 우선 적당히 무례해야 한다. 식탁에서 식사할 때는 ‘어찌어찌 해야 한다’는 신사의 매너 같은 건 잠시 잊도록 하자. 일단 넥타이를 반쯤 푼다. 그러곤 젓갈을 넣지 않은 평양식 김치를 몇 점 넣고 면을 그릇 가운데로 모은다. 이제 초등학교 때 배운 모세관 현상을 적극 활용할 차례다. 돼지고기 한 점, 김치 한 조각과 함께 우악스럽게 한 젓가락 크게 집어 되도록 많은 양의 육수가 면발 사이사이 스며들어 입 안에 같이 들어올 수 있도록 크게 소리 내어 먹는다. “후루룩.” 이게 끝이 아니다. 벨트를 풀고 육수를 ‘쭈욱’ 들이켜야 한다. 용감하게.
친구들아 연락해라. 냉면 한 그릇 사마!
전형선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한국 지사장. 1996년 부터 14년째 한국 시장 개척을 진두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