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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북한 정상화를 위한 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북한은 헌법을 개정해 국가주석직을 폐지함으로써 김정일 (金正日) 이 주석 자리에 오르리라는 일반의 예측을 뒤집었다.

그동안의 예측에는 어차피 김정일이 실질적으로 북한의 최고 실력자인 이상 아예 공식적으로 주석직을 승계해 국정을 운영함으로써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로서 기능해주기 바라는 기대도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는 김정일이 권한이 강화된 국방위원장직을 맡는 다소 편법적인 방식을 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대사를 통해 이 자리를 "정치.군사.경제역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여 나라의 방위력과 전반적 국력을 강화, 발전시키는 국가의 최고직책" 이라고 설명했으나, 이는 현실을 감안한 확대해석일 뿐이다.

개정된 헌법에는 국방위원회가 분명히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 '전반적 국방관리기관' 으로만 규정돼 있다.

결국 주석직 폐지 조치는 김정일이 군림은 하되 책임은 안 지려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우리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를 지켜보면서 다음 몇가지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첫째, 김정일과 그의 핵심 추종세력은 그들이 처한 대내외적인 상황을 여전히 김정일체제 공고화에 대한 위기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주석직에 취임하기보다 국방위원회의 기능을 강화해 물리력에 의한 체제유지를 도모하는 비상체제를 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부 지지와 군사력 시위가 대내적 결속과 대외적 저항의 수단이 되는, 즉 바늘을 잔뜩 세우고 움츠린 '고슴도치전략' 을 채택하고 있으며, 최근 장거리 미사일 발사시위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 주장) 도 이런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불리한 대내외적 여건, 특히 경제상황이 좋지 않은 여건에서 김정일을 주석으로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뒤에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위기관리자' 로서의 실권을 행사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 조치는 김정일시대의 공식개막보다 오히려 이를 유보하는 과도기적 조치, 즉 아직 김일성 (金日成) 의 후광과 유훈을 내세워야 하는 김일성시대의 지속으로 볼 수도 있다.

셋째, 전면적 개혁과 개방 같은 정책의 일대 전환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다만 기존 노선 위에서 경제정책의 탄력적 운용은 가능하다고 본다.

특히 정무원제에서 내각제로 전환됨에 따라 총리 책임 아래 부분적 경제개혁이 실험적으로 시도될 수 있으며, 실패의 경우 내각사퇴나 개편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이점은 지닌다.

실패한 정책에 대한 책임소재가 김정일에게까지 미치지 않는 구조를 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넷째, 헌법개정이 아무때나, 마음대로 이루어질 정도로 북한체제 안에서 김정일에 대한 충성은 강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이러한 사태진전은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국제화와 세계화, 그리고 합리화가 커다른 조류가 되고 있는 현재의 추세에 역행하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우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한을 포함한 외부로부터 물리적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재 아무도 북한을 위협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한 사람들은 이제 무조건 북한이 망하기만 바랄 정도로 비합리적인 단계는 벗어나 있다.

따라서 무장과 호전적 태도로 또는 고립주의로 당면한 어려움을 풀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북한 체제를 위협하는 최대의 요소는 하루가 무섭게 변하는 세상인데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식대로 살기' 의 고집에 있다는 것을 金위원장은 알아야 한다.

북한은 모든 나라와 선린우호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평화지향적인 정책으로 전환해야 하고, 특히 남한과의 관계개선부터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북한이 정상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멀지 않은 시점에서 북한이 다시 헌법을 개정, 호전적인 국방위원회 강화 조치에서 후퇴해 金위원장이 떳떳하게 주석직에 취임하게 되기를 바란다.

金위원장이 국가주석으로 정상적인 국정을 운영할 때 북한도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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