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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패트롤]'원칙'없는 구조조정에 혼란 가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요즘 우리 경제가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모든 것들이 뒤엉켜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풀리지 않고 있는 형국이다.

1년여를 끌어온 기아문제나 정리해고를 둘러싼 해법들이 그렇고,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이 돼가는 모습들도 마찬가지다.

경제의 버팀목인 내수와 수출, 투자 동향 또한 개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거기에 외부여건마저 춤을 추는 상황이어서 현재로선 허우적거리는 우리 경제가 언제 발을 바닥에 대고 다시 솟구쳐오를지 전망하는 일조차 불가능한 '총체적 불확실성' 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마저 갖게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 을 잃지 않는 것인데도 돌아가는 모습은 그와 거리가 멀다.

하나만 예를 들자. 금융구조조정, 그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은행쪽 얘기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최근 지난해말 기준 국제결제은행 (BIS) 비율 8%를 넘긴 13개 은행에 대해 6월말 시점에서 새 성적표를 매겼다.

잣대는 세가지다.

하나는 기존의 은행감독원 기준, 또 하나는 99년부터 적용될 새 은감원 기준, 마지막은 이보다 훨씬 강도높은 이른바 국제기준. 하지만 금감위는 이 평가결과에 대해 '구 은감원 기준으로는 모두 8%를 넘었다' 는 두루뭉실한 얘기만 흘렸을 뿐 나머지는 '해당은행의 신인도를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 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새 은감원기준' 으로 새로운 성적표가 공개된 7개 조건부승인은행들 중 성적이 엉망인 은행들의 해외 차입줄이 막히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험한 꼴' 을 본 은행들이 형평성을 들어, 또 외국인 투자가들이 투명성을 들어 불만을 표시한 것은 당연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하나.보람은행의 합병에 따른 증자지원과 관련, '새 기준에 따르면 하나는 10%를 넘는 반면 보람은 5.6%에 그쳐 증자후 합병이 불가피하다' 는 얘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스스로 공개불가 원칙 - 그것도 원칙이라면 - 을 깨뜨린 것이다.

예금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개불가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BIS 자기자본비율이 얼마인가가 우량.부실의 유일한 척도인 것처럼 생각하게 해놓고서는 이제와서는 성적을 공개할 수 없다니 도대체 뭘 믿고 은행 선택의 기준을 삼으라는 것인지 헷갈리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는 금융구조조정을 이달안에 일단 마무리짓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일단 마무리' 라는 것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선 어느 은행에 얼마를 증자지원할지, 또 부실채권은 얼마나 털어줄지 등을 정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같은 숫자의 제시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아직껏 보여주지 못한 형평성과 투명성, 나아가 이를 관통하는 '원칙' 의 견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일이다.

박태욱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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