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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화려한 도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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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그래도 그 속에 사는 나로선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다. 치솟는 집값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니 그 때문은 아니고 그냥 오랜만에 겪어 보는 결핍된 도시의 모습이 신선해서다. 상가가 없으니 몇 층으로 늘어선 간판도 없고, 요란하게 울려대는 음악소리도 없고 그곳을 휘감는 흐릿한 음식냄새나 술기운 같은 것도 없다. 무엇보다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어둠이 이곳에서는 보인다. 시골하늘의 밤하늘 별빛을 운운할 정도로 캄캄함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곳은 불빛으로 점령당한 여느 도시의 모습과는 다르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시를 지나 이쪽 마을로 들어서면 피곤한 하루의 일상을 마감하기에 맞춤 맞은 적막감이 기분 좋게 밀려든다.

도시 안에 있을 때 눈은 피곤하다. 지하철에서는 통로마다 심지어 승강장의 스크린도어에까지 빼곡히 광고판과 안내문이 붙어 있어 눈을 돌리려 해도 돌릴 곳이 없다. 상가의 간판과 불빛, 그리고 전광판들은 지나치게 번쩍거려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 된다. 어린 시절 파리의 개선문 같은 곳에 비춰지던 조명을 보며 ‘우리나라도 저렇게 조명을 쓰면 참 멋있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 도시의 불빛은 문화재를 비춰 주는 것은 물론 온갖 건물들과 고층 아파트의 옥상까지 죄다 환하게 밝히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이 아래에서 위로 비춘 조명이다. 이쯤 되면 밤을 ‘밝힌다’거나 ‘비춘다’는 말보단 그저 빛을 ‘쏘아댄다’라는 말이 더 적당할 듯하다.

불빛은 물과 다리도 놓아 두지 않는다. 요즘은 유명 해수욕장을 가면 밤바다에 불을 밝힌다. “검은 빛 바다 위를 저어가는~” ‘밤배’라는 노래는 그러니 요즘 바닷가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청계천을 보고 놀란 건 그 물가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조명쇼였다. 반포대교에서는 물과 불의 색색 향연이 장관을 이루는 무지개 분수쇼가 기네스 북에 오를 만큼의 거대한 스케일로 매일 밤 펼쳐진다. 어두컴컴한 도시의 모습도 아름답진 않겠지만 일상의 공간인 도시 곳곳에서 펼쳐지는 비일상적인 이런 조명쇼들은 왠지 아름다움이란 말보단 쉴 곳 없는 피곤함을 더 떠올리게 한다.

사실 피곤한 내 눈을 불평하는 것보다 ‘빛 공해’는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밝아진 밤하늘 때문에 미국의 한 유명 천문대는 문을 닫았고 불빛을 달빛으로 착각해 길을 잃는 철새들이나 불빛을 따라다니는 나방의 활동을 교란하는 등 생태계 위협의 문제까지 있다고 한다. 아래에서 위로 쏘는 조명을 도시 차원에서 규제하고 있는 요코하마나 파리 등의 사례를 참고해 요란한 간판을 정비하듯 우리 도시의 조명도 좀 규모 있게 정비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도시’의 재미를 즐기면서 집으로 돌아오던 며칠 전 저녁 ‘허걱’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나가는 육교와 고속도로 소음 덮개판 위에 갖가지 색깔의 조명이 알록달록 켜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조명이란 말인가. 어둠의 빈틈을 내버려 두지 않는 이 꼼꼼한 도시의 조명은 어쩐지 반갑지가 않다.

이윤정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