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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성월'에 돌아본 한국 천주교 박해의 역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천주교의 9월은 '순교자 성월 (聖月)' .천주교에 국한되는 행사이긴 하나 일반인에게도 신앙과 목숨을 맞바꾼 순교자의 삶을 기리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경제한파로 그 어느때보다 불굴의 용기가 필요한 때, '포도청등록' '조선왕조실록'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등에 나타난 형극의 길을 교회사연구소 차기진박사의 도움으로 되짚어 본다.

우리나라 천주교박해는 지금의 명동성당 터에 자리잡았던 명례방에서 김범우 등이 신앙집회를 가지다가 적발되면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1785년의 을사박해다.

김범우는 결국 경남밀양으로 유배가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천주교 박해는 그 후 개항 (開港) 을 한 1876년까지 1백년 가까이 계속됐다.

수많은 박해 중에서도 1801년 중국인 신부인 주문모를 비롯해 이승훈.정약종.황사영 등이 처형당한 신유박해, 1839년 프랑스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등이 순교한 기해박해, 184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경기도 은이공소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올리고 순교한 병오박해, 1866년부터 7년동안 베르뇌주교.남종삼 등 무려 8천여명이 목숨을 잃은 병인박해가 '4대박해' 로 꼽힌다.

이렇게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해 보였던 천주교신자들은 모두 1만여명. 조선시대에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형벌이 일반 죄인들보다 더 가혹했다.

반역죄가 적용되었던 것. 이들은 목을 베어 장대에 꽂아 높이 매달아 놓는 군문효수 (軍門梟首)에 처해졌다.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줘 천주교에는 아예 얼씬도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김대건신부도 이런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참수한 뒤 시신의 사지를 찢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시신을 장터 여기저기 버리는 처벌도 동원되었다.

황사영이 이런 처형으로 순교했다.

천주교가 순교라고 인정하는 기준은 엄격한 편이다.

세가지 조건을 다 만족시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증거를 끝까지 보여야 하고, 꼭 신앙인으로 탄압을 받아야 하며 그 탄압으로 혈세 (血洗) 를 받아야 한다.

이들 순교자 중에서 지난 84년 김대건.정화상.남종삼.베르뇌주교등 1백3명이 성인에 올랐다.

1836년 당시 제2대교구장이었던 앵베르주교가 순교자료를 처음 수집하기 시작했으니 무려 1백50년 만의 일이다.

지금도 전주교구와 수원교구에서 유항검.주문모 등 13명에 대해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허가를 받고 시성시복작업을 진행중이다.

성인에 오르는 사람은 '성인록' 에 등록되어 세계교회로부터 공적인 존경을 받게 된다.

국내 천주교의 각 교구에서는 오는 20일을 전후해 순교자현양대회를 갖는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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