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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북한탐험]4.백두산 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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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조선후기 인문지리학의 대표적 존재인 이중환 (李重煥) 은 백두산을 지나치게 중국 대륙에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

저 중국 대륙, 조종 (祖宗) 의 산 곤륜의 한 갈래가 동으로 동으로 뻗어오다가 요하 동쪽의 큰 벌에서 엎드려 기운을 모아가지고 고개 들어 동방의 산조 (山祖)가 된 것이 백두산이라 했다.

나는 이런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기야 이 세상 어느 산, 어느 물인들 9만리 밖의 그것과 연속되지 않은 것이 없을진대 그 말의 액면을 모조리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지리까지도 이소사대 (以小事大) 의 노선으로 파악하는 오랜 동이론 (東夷論) 이나 '해동 (海東) 주의' 에 길들여진 것이 틀림없다.

이왕 큰 산에 의존하려거든 곤륜산 남쪽에 군림하는 세계의 지붕 용마루인 설산 (히말라야) 과 남남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백두산의 형세는 그 독립성에 있다.

그것이 곤륜이든 알타이나 사얀이든 그런 머나먼 곳의 명산들과 굳이 이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연립성보다 독립성이 백두산의 특장 (特長) 이다.

마치 저 혼자의 의지로 땅속에서 억겁의 흑암을 물리치고 솟아오른 고독한 실재의 출현이 바로 백두산인 것이다.

그런 백두산이므로 능히 그 태생의 임무가 산 자체만의 실재가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역을 포진하는 하나의 대륙이 됐다.

만주벌판과 한반도가 그것이다.

동해 울릉도까지가 그것이다.

동해 건너 일본 아오모리 (靑森)에서 최근 백두산 정상에서만 볼 수 있는 화산폭발의 지층 단면들이 조사돼 아오모리시장이 직접 백두산을 찾아온 적도 있다.

그렇다면 백두산은 일본열도까지도 그의 작품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옛 지학 (地學)에서는 산세를 용 (龍) 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대간룡 (大幹龍) 은 국토의 등줄기가 된다.

백두대간 백두정맥 (白頭正脈) 이 바로 한반도의 운명을 담당한다.

이 운명의 원점이 백두산이고 그것이 동북아시아의 모태인 것이다.

굳이 백두산의 의미를 독자성에서 연대성으로 펴놓자면 거꾸로 한반도에서 발해만 건너 중국 산동성이나 동해 건너 일본까지 경영하는 커다란 역사적 공간이 바로 백두산이다.

나는 더이상 천지 친견 (親見) 의 시간을 연장할 수 없었다.

그 허공 전체를 내 옷과 함께 찢어발기는 비바람을 견딜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잠깐 보였던 천지와 그 위 연봉들, 중국쪽 천문봉이나 그 아래 달문 따위는 어디에 그런 것이 있었나 싶게 오직 비바람 속이었다.

나는 백두산 망천후 바로 밑에서 한걸음만 헛디뎌도 저 아래 천지 밑으로 날아가버릴 그 아슬아슬한 곳에서 오던 길로 돌아섰다.

온몸은 물덩어리였다.

삭도 (索道) 정거장 백두역도 죽은 듯했다.

정상 바로 밑에 있는 국경초소의 어린 병사도 그 사나운 비바람 속에서 속수무책의 고독에 묻혀 있었다.

아니, 해발 2천5백m 상공의 백두산 새매조차 어디로 가버렸다.

있는 것은 오직 귀청을 찢는 비바람이었다.

빗줄기만 총알처럼 풀 한 포기 없는 땅바닥에 마구 퍼부어대고 있었다.

'산해경' 대황북경 (大荒北經) 은 말한다.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 (不咸) 이라 이름한다. 숙신 땅에 속한다. " 여기서 말하는 불함은 '' 의 역음이겠다.

천지신명이다.

이런 하늘과 땅의 신이라면 그 신이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최초의 절대적 의인 (擬人) 일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침 끼니를 때우자마자 다시 정상을 향했다.

이번에는 어떤 악천후도 헤쳐갈 작정이었다.

어제의 길을 다시 달려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이 순례이고 몇 날 며칠을 걸려서 가는 것이 순례인데 이렇듯이 오전 한나절로 정상을 다녀오기에는 망극한 노릇이었다.

백두산은 우리에게 태고의 산이다.

그러나 그 곳은 3백년 전에도 한번 불을 뿜어 사방의 원근 각처에 불덩어리를 날린 분화가 있었다.

역사에 역사가 거듭 쌓여서 새로운 역사였다.

백두산 정상 장군봉에 이르렀다.

그 장군봉 끝에서 바로 낭떠러지가 천지물에 이르고 있다.

한 걸음 떼어놓기도 쉽지 않았다.

여기가 한반도 조종의 산 백두산 장군봉 2천7백50m 높이 그 곳이었다.

발은 땅을 디디고 있으되 온몸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제의 비바람 대신 우유를 풀어낸 듯한 구름장이었는데 그 구름을 풀어주어 몇분동안 정상 열여섯 봉우리의 그 단호한 얼굴들을 다 바라볼 수 있었다.

장군봉은 본디 옛말로 하늘을 뜻하는 '당굴' 이 와전돼 장군이 되고 장군이 대장 (大將) 혹은 병사 (兵使)가 됐는데 일제 식민지 대정 (大正) 연간에는 이 장군봉을 일본왕의 이름을 따서 대정봉이라고 우겨대기도 했다.

열여섯 연봉 가운데 천지에 더 나아간 망천후의 세 봉우리중 하나를 비로봉이라 한다.

이는 묘향산.금강산, 그밖의 산들의 꼭대기를 두루 법신불 (法身佛)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삼는 오랜 신심을 밝혀준다.

나는 장군봉에서 백두산의 사방에 엎드려 큰절을 했고 그 아래에서 즉흥시를 써서 목청껏 예송 (禮誦) 했다.

이제 나는 이 세상의 소원 하나를 풀었다.

"여기 백두산 열여섯 봉우리 네 이름 부른다.

… 여기 백두산 열여섯 봉우리에 이어 / 삼천리강산 온갖 산 온갖 봉우리 / 온갖 골짜기 / 그 이름들 부른다.

/ 지난 날 이 겨레 극심하게 잃은 것들 / 찾아내는 기쁨으로 / 모든 것 다 이름 붙여 / 그 이름 부른다… 이 나라 온통 하나의 백두산인 그날을 / 네 이름으로 삼가 부르고 또 부른다. "

나뿐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장군봉 위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 백두산의 천기 (天氣) 와 지령 (地靈) 의 그 합일을 통한 인심 (人心) 의 시원을 체험할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장군봉에서 내려서는 순간 큰 가슴의 시인이 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일찍이 다른 나라의 시인이 청일전쟁 직후의 우리나라 변경에 여행하는 동안 백의민족처럼 시적 (詩的) 인 민족은 없다고 말한 그대로 백두산의 그 웅장하고 비장한 자연의 걸작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저마다 유구한 시심 (詩心) 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지지리 못난 패거리를 만들고 떨거지를 만드는 그 파쟁이나 분열과 비창조적인 불화를 다 털어버린 그 텅 빈 마음에 찬란한 영혼의 금 (琴) 이 울려드는 그런 새로운 날이 거기서 구름처럼 피어나리라.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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