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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의 우승 소감이 딸랑 ‘생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3호 16면

“생큐(Thank you).”
LPGA투어 최고 권위의 대회에서 우승한 소감치곤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통역을 통해 소감을 전달했다곤 하지만 그녀가 직접 한 말이라곤 겨우 ‘생큐’ 한마디였다. 13일 US여자오픈에서 극적인 역전 우승을 차지한 지은희(23) 선수 이야기다. 마이크를 내밀었던 미국의 NBC방송 관계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서둘러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미국의 내셔널 타이틀 대회에서 우승한 소감이 ‘생큐’ 한마디라니-. 당장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댓글이 폭주했다. 전국지인 USA투데이의 인터넷판에 나붙은 댓글을 보자.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68>

“LPGA는 이제 망했다. 외국 선수들이 침략해 온 탓이다. LPGA는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과 영어를 못하는 선수의 출전을 금지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영어도 못하는 외국 선수들을 보고 싶지 않다.”(하버드79)

“나는 LPGA 경기에서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중계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국 TV를 보는 느낌이다. 상위 랭커 5명 중 4명은 아시안이다. 미국인 대다수는 아시안 스포츠 이벤트에 관심이 없다.”(골프 팬)

아주 듣기 거북한 내용들이다. 물론 이들의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을 나무라는 이도 적지 않다.

“한국 선수들을 탓하는 건 핑계일 뿐이다. 이긴 건 분명히 이긴 거고, 변명은 패자의 몫이다.”(nowayjose)

“LPGA투어는 분명히 국제적인 투어이고, 이제 외국 선수들이 우승하는 것에 대해 익숙해질 때도 됐다. 로레나 오초아나 스웨덴 선수들이 우승했을 때는 왜 불평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mles)

18번 홀, 지은희의 마지막 퍼트는 대회 역사에 남을 만한 멋진 샷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보여 준 그의 멋진 기량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아쉽다. 미국 생활이 벌써 3년째, 영어로 우승 소감 한마디쯤은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승 트로피를 안고 귀국한 지은희에게 왜 그랬는지 물어 봤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완벽주의자다. 방송 인터뷰를 하기엔 내 영어 실력이 너무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말로 대답했다.”

문법적으로 틀릴까 봐, 발음이 좋지 않아 영어를 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겸손이 미덕인 동양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다. 미국 땅에서 열리는 대회에선 문법이 맞건 틀리건 영어로 인터뷰하는 것이 좋다. 주최 측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지은희는 훌륭한 선수다. 지난해 LPGA투어 개막전 당시 에피소드. 동료 선수가 자신의 스코어를 잘못 기재한 사실을 발견한 지은희는 주최 측에 자진해 신고하고 실격당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가 그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지은희는 이 일로 동료 선수들의 신뢰를 얻었다. 성격이 까칠하기로 이름난 크리스티 커가 마지막 날 챔피언 조에서 맞붙은 지은희에게 친절하게 대한 것도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음에 또 우승한다면 영어로 당당하게 우승 인터뷰를 해 주길 바란다. 말은 인격을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골프 실력만큼이나 훌륭한 지은희의 인격을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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