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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중도 강화, 내용이 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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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나는 사회적 자유주의자(Social liberal)다.” “사회적 자유주의자의 간판정책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패자에 대한 배려”라고 대답했다. “경제성장에서는 패자도 생긴다. 국가가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좋은 교육을 제공해 빈부 격차를 줄여 줄 책임이 있다.”

크바시니에프스키는 유럽 선진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은 분배의 문제로 고민하지만 폴란드는 성장의 문제로 고민한다고 강조했다. “파이를 키워서 선진국 수준에 접근하는 게 중요해요.” 그는 빈곤의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쏟는 정부는 경제를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하고, 자유주의 원칙만 고집하는 정부는 파티에서 다른 사람들은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데 혼자만 화려한 옷을 입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좌파 사회주의도 아니고 우파 자유주의도 아닌 크바시니에프스키의 이념적 좌표는 2009년 한국의 대통령이 애용하는 정치용어로는 중도(Middle)다. 크바시니에프스키의 ‘패자(Loser)’는 이명박의 ‘서민’일 것이다.

크바시니에프스키는 ‘사회적 자유주의’의 자유주의 입장에서 파이를 키워(경제를 성장시켜) 그 과실로 사회적인 패자를 지원한다는 비전이 분명했다. 대조적으로 한국의 대통령은 중도 강화의 깃발을 들고 떡볶이집과 생선가게와 보육원을 뛰어다니면서 서민 살리기를 포교하는데 포괄적 정책 내용을 안 밝힌다.

기업 하는 사람들이 좌불안석이 돼 그의 입을 쳐다보지만 파이 키우기와 나누기의 선후 관계와 정책상의 경중은 오리무중이다. 대통령의 머릿속에 있는 서민은 누구이며 중산층은 누구인가. 서민을 중산층 아래 있는 계층으로 보고 그들을 중산층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인가. 무엇을(what), 어떻게(How) 하겠다는 설명이 빨리 나와야 한다.

노무현 좌파정부는 국민을 서민 80%와 부자 20%로 찢어 부자에 대한 세금폭탄 투하를 서민대책의 축으로 삼았다. 그걸 시정하겠다고 공약한 이 대통령은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법 만들기를 게을리해 그의 지지자들 사이에는 이명박이 ‘이무현’이 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생긴다.

냉전 종식으로 세계질서가 개편된 90년대 초반 이후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은 중도 또는 제3의 길 프로그램을 가장 먼저 들고 나온 정치인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다. 85년 창립된 민주당의 리더십협의회(DLC)는 90년 아칸소 주지사 클린턴을 의장으로 회의를 열고 ‘뉴올리언스 선언’이라는 것을 채택했다. 이 선언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 정부 확대가 아니라 기회 확대, 그리고 포용정치를 약속했다.

클린턴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은 92년 ‘뉴올리언스 선언’을 핵심 내용으로 신민주당 강령을 만들었다. 민주당의 새 강령은 서민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국민을 통합하는 정치를 펼 프로그램을 밝혔다. 경제정책의 기조는 성장으로 못 박았다.

클린턴은 이 강령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 민주당의 중도 또는 제3의 길은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99년 ‘블레어-슈뢰더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중도개혁의 유럽 확산을 주도했다.

그해 유서 깊은 국제 사회주의 운동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도 파리대회에서 중도를 중심철학으로 하는 ‘파리선언’을 채택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적자생존적 신자유주의는 부시와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이미 퇴장했거나 퇴장할 운명이다. 9·11이 아니었으면 부시도 왼쪽으로 조금 이동했을 것이다. 보수 우파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도 약간의 중도 이동은 시대적 요청이다.

그는 중도와 제3의 길을 먼저 걸은 클린턴과 블레어와 슈뢰더를 면밀히 벤치마킹하여 한국의 풍토에 맞는 중도 강화와 서민 지원의 비전과 포괄적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

좌파 노조와 야당의 저항이 거세도 파이는 키워서 나눈다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의 철학을 실행하는 데 정치력을 쏟아야 한다. 서민들 사는 데에 발품 파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촛불과 노무현 애도 쓰나미에 놀라 비전도 실천강령도 없이 중도 강화의 말을 탔다면 한국과 그에게 불행한 결과가 올 것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