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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팔아서 밥벌이해야 할 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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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유난히 후텁지근했던 7월 8일 오후, 서울 성수동의 한 주택가. 크지 않은 상권임에도 유독 깨끗하고 번듯한 2층 건물이 눈에 띈다. 건물 1층엔 기업형 수퍼마켓 ‘롯데슈퍼’가 둥지를 틀고 있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니 판매직원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종로 동네 수퍼마켓 르포 #기업형 수퍼마켓 부상에 파리만 날려

“특별행사로 싸게 물건을 드립니다.” 고객 잡기에 여념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 매장의 크기는 대략 600㎡. 롯데마트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라 1병, 토마토 1봉을 구입한 뒤 계산 순서를 기다리는데 카운터마다 줄을 선 사람이 3명 남짓이다. 영업이 그만큼 잘된다는 방증. 밖으로 나오니 수퍼 건물과 불과 1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골목길 수퍼마켓이 있다.

‘이런 곳에서 장사가 되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가게로 향했다. 10개들이로 포장된 자두를 집어 들고 얼마냐고 물으니 50대 가게주인은 “3000원만 내라”고 한다. “에이! 롯데슈퍼보다 비싸네요.” 주인에게 5000원짜리를 건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실 롯데슈퍼에 비해 비싸거나 품질이 떨어졌던 것은 아니다.

반응을 떠보려 넌지시 물어봤을 뿐…. 그런 소리 많이 들어봤다는 듯 영세 수퍼 주인이 한마디 쏘아붙인다.“참내, 그놈의 롯데슈퍼…. 그래도 우리 것이 더 맛있어요. 과일 맛을 아는 사람들은 저기(롯데슈퍼) 안 가고 저희 가게로 와요.” 그 자리에서 자두를 한 개 베어 물며 대형 수퍼와 경쟁하는 게 버겁지 않으냐고 물었다.

주인은 2000원을 거슬러 주며 이렇게 말했다. “답답하죠. 식료품과 공산품은 우리 가게에서 도통 구입하질 않아요. 그나마 과일 손님이 있는 편인데 그것도 단골일 뿐이고 새로운 손님 확보는 쉽지 않죠.”위치를 옮겨 종로구 숭인동 청계 힐스테이트 주변 샛길로 이동했다.

대로변 입구부터 아파트단지 끝자락까지 이어진 300여m 규모의 샛길 골목 상권은 거의 ‘영세 수퍼마켓’의 집합소나 다름없다. 5~10m 간격으로 몇 걸음 걸을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영세 수퍼들. 줄잡아 20개 가까운 구멍가게들이 힐스테이트 입주민과 인근 주택가 주민들을 상대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골목길 수퍼 업주 “기업형 수퍼 무섭다”

그러나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들 골목 상인이 두려워하는 강력한 경쟁상대가 있다. 동묘앞역 인근에 자리 잡은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이곳은 주요 고객 타깃인 롯데캐슬아파트 입주민 외에도 청계 힐스테이트 주민들을 배후고객으로 삼고 있어 아파트 사잇길 영세업체 상인들과의 경쟁이 불가피하다.

“가게를 접든지 해야지 원…. 아이스크림만 팔아서 뭐 나오겠어.” 샛길 골목 상권에서 소형 마트를 운영 중인 60대 할머니는 그나마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인 ‘50% 세일 아이스크림’을 기자에게 건네며 넋두리에 여념이 없었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기업형 수퍼마켓과 지역 영세업체의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업형 수퍼마켓은 ‘대형 마트보다는 가깝고, 일반 수퍼보다는 품격 있는 서비스’를 기치로 최근 2~3년 사이 ‘골목 상권’의 새로운 총아로 떠올랐다. 현재 운영 중인 기업형 수퍼마켓은 삼성테스코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롯데쇼핑의 ‘롯데슈퍼’, GS리테일의 ‘GS수퍼’ 등. 전국적으로 450여 곳이 성업하고 있다.

이 같은 기업형 수퍼마켓 운영에 대해 지역 영세상인들은 “대기업이 지역상인의 밥그릇까지 침범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반면 기업형 수퍼마켓을 운영하는 대형 유통사는 “소비자의 선택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어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지역 영세상인들은 기업형 수퍼마켓이 동네 어귀에 들어오면서 매출이 눈에 띄게 줄었고 아예 폐업하는 업체도 늘어났다며 ‘기업형 수퍼마켓 규제 및 퇴출’ 등의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형 유통사는 영세상인들의 소득 감소를 기업형 수퍼마켓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영세업체들이 매출부진을 겪는 건 비체계적인 서비스, 타 유통수단의 발달 등 여러 요인에서 찾아야 하는데 기업형 수퍼마켓만 집요하게 부각한다는 것이다.

롯데쇼핑 수퍼사업본부 마케팅팀 관계자는 “현재 인터넷쇼핑몰, 홈쇼핑, 방문판매 등 다양한 유통방식이 있다”며 “영세상인들의 매출감소는 이들 모두가 복합적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기업형 수퍼마켓만 공격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 고 주장했다.

현재 국회 지식경제위원회에서는 기업형 수퍼마켓에 대한 허가제 도입, 교통영향평가, 영업시간 제한 등 각종 규제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와 관련한 여야 간 입장차이, 해당 정책의 적법성 문제 등 난제가 적지 않지만 표면상으로는 골목길 상인의 주장을 상당부분 수용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형 수퍼마켓 업계와 일부 정부부처에선 이런 조치에 대해 ‘WTO 규정에 위배돼 무역통상 마찰 소지가 있다’ ‘헌법상 영업활동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등의 논리로 규제안을 반대하고 있어 또 다른 갈등이 우려된다. 현재 대형 유통사와 골목길 상인 간 가장 첨예하게 논쟁을 벌이는 부분은 바로 시장 논리.

한쪽은 소비자의 선택 권리를 주장하며 시장 논리로 맞서고, 다른 한쪽은 균형적인 상권 유지와 영세상인의 경제 불안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영세상인의 경제 불안은 생존권 논쟁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여론의 관심도 높다.

골목길 수퍼마켓도 경쟁력 갖춰야

기업형 수퍼마켓 저지 비상대책위 정준식 실무간사는 “기업형 수퍼마켓에 밀려 영세상인이 실업자가 되고 대출금도 못 갚아 빚더미에 앉게 되면 그에 딸린 가족들도 모두 죽는 거나 다름없다”며 “이런 상황이 가속화되면 그 사회적 후폭풍은 누가 감당하겠나”라고 한탄했다.

정 간사는 또 “결국 대기업이 거대 자본을 앞세워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형 유통사는 ‘자본만으로 기업형 수퍼마켓이 성공했다고 몰아가는 것은 오해’라는 입장이다. 홈플러스 강정현 과장은 “우리 기업형 수퍼마켓 업체들도 사업초기에는 폐업률이 꽤 높았다”며 “자본으로만 승부가 가능했다면 왜 폐업했겠는가”라고 했다.

그는 또 “실패에 따른 시행착오를 줄이고자 고객연구에 몰두하고 서비스 개선을 이룬 결과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지, 자본의 힘으로 시장을 장악했다는 (영세업체들의) 논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양측의 갈등에 대해 소비자들은 편의에 따른 다소 모호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영세업체를 살리고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상권 독점을 방지하는 데 동의하지만 막상 가까운 거리에 기업형 수퍼마켓이 있을 경우 이를 이용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영세업체가 서비스 개선에 힘을 기울여 자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경기도 안산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기업형 수퍼마켓과 골목 수퍼를 번갈아 이용한다는 이수빈(34·안산시 사동) 주부는 “사실 가격적인 면에선 영세상점과 기업형 수퍼마켓의 차이가 없을 때가 많다”며 “하지만 골목 수퍼의 경우 손님이 와도 인사도 안 하는 등 서비스정신이 부족한 업체가 적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이번 일을 계기로 불친절한 영세업체들도 서비스정신을 높이고 체질개선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두진 객원기자·tttfocu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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