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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수 여류 시동인 '청미회'35년 활동 마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청미 (靑眉) .푸른 눈섭이 하얀 눈섭이 되도록 여성시의 신서정을 일궈온 최장수 여류시동인 청미회가 27일 동인활동 35년의 막을 내린다.

1963년 20대 푸르른 처녀시인 7명으로 모였던 이 동인들은 이제 모두 이순 (耳順) 의 나이를 넘겼다.

"인생이 참으로/풀잎에 맺힌/이슬이어든//하늘 같은 임아/네 옆에/항상/나//바늘에/실이련 듯/실이련 듯/좇아 있음에야//나 어이/넘치는 기쁨으로/번뜩여 살지 않을리야. " 63년 첫 동인지에 실린 허영자씨의 '하늘 같은 임' 이다.

시인이기에 인생이 초로 (草露) 같이 덧없음은 일찌감치 감지했지만 넘치는 기쁨과 서정의 번뜩임이 동인들의 젊은 시절을 지배했다.

"푸르름을 숭상하던 마음 거두어/사라져가는 것을 사랑하라고//앞을 막아서는 바위 같은 절망을/물처럼 고요히 싸안으라고//가을이 가을이/나에게 가르친다.

" 30주년 기념으로 나온 제21동인지에 실린 허씨의 '가을이' 다.

봄에서 이제 가을로 넘어오고 기쁨과 번뜩임은 속 깊은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바뀌며 결실을 향하고 있다.

김선영.김숙자.김혜숙.김후란.박영숙.추영수.허영자씨 7명으로 출발한 청미회는 이후 김숙자.박영숙씨가 빠지고 이경희.임성숙씨가 대신 지금까지 활동해왔다.

6.25의 상흔이 채 안가시고 군부 쿠데타로 4.19의 자유가 억압당했다.

시도 당연히 폐허의 감상과 부정, 그리고 저항으로 나갔다.

또 한편으로는 실험정신에 입각, 시의 현대성을 향한 시도도 있었다.

이런 경향과 이념에 따라 동인활동이 펼쳐지는 것이지만 청미회는 파벌을 초월, 유난히 목소리를 높이거나 두드려지려하지 않고 시의 평균율을 지켜나갔다.

동인지 발간과 함께 시낭송회.시화전 등을 펼치며 여성시의 부드러움으로 조용히 대중에게도 다가갔다.

문학평론가 김용직씨는 청미회가 한국현대시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논리와 구호.이데올로기와 같은 살벌한 말들이 아니라 좀더 우리를 감쌀 수 있는 정서의 빈터를 메웠다" 고 밝혔다.

청미회는 동인활동을 마감하며 그동안 펴낸 동인지 21권을 묶은 '청미동인시지총집' 을 두권으로 펴냈다 (도서출판 마을刊) .그리고 27일 오후6시 프라자호텔 덕수홀에서 그 출판기념과 함께 동인회가 고별한다.

이 자리에 원로.중진 문인 1백여명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청미회의 활동을 통해 우리 현대시사를 추억하게 된다.

"가슴 뜨거운 얽힘이 있어/서로를 잊지 못하네//그리운 날들/그리운 이름들/노을이 지는/아름다움처럼/눈시울이 젖으면서//먼 먼 길이/떠나가는 시간으로/이어지네. " 김후란씨의 '떠나가는 시간' 일부 처럼 청미회는 이제 백미 (白眉)가 되어 떠나간다.

더나는 것의 뒷모습은 꽃 그늘처럼 역설적으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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