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청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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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북송(北宋·960~1126) 때 개혁정치를 펼쳤던 인물 중 하나가 범중엄(范仲淹)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가 개가하는 상황을 맞았던 그는 집을 떠나 절에서 힘겨운 배움길에 들어선다. 가난했던 그는 죽을 끓여 식힌 뒤 네 조각으로 나눠 차가운 죽 두 덩어리로 하루의 끼니를 때웠다. 이른바 죽을 나눈다라는 뜻의 ‘획죽(劃粥)’이라는 고사 속 주인공이다.

아주 어렵게 공부를 해서 진사에 급제했지만 그는 벼슬자리에서 결코 영달(榮達)을 추구하지 않았다. 백성을 중시하는 민본(民本)의 입장에 서서 끊임없는 개혁 정치를 펼쳐 조정 안팎과 민간에서 고루 존경을 받았다.

정쟁에 말려 지방 벼슬아치로 좌천된 그에게 어느 날 하루 친구로부터 편지가 날아든다. 명승지로 유명한 악양루(岳陽樓)를 수리했으니 글을 지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장강(長江)가에 있어 경치가 매우 빼어난 이 누각을 위해 지은 그의 글 ‘악양루기(岳陽樓記)’는 지금까지 명문 중의 명문으로 전해진다.

청렴한 관리, 청관(淸官)의 기개를 그렸기 때문이다. 친구가 보내온 누각 주변의 그림을 보며 우선 그는 그 뛰어난 풍광을 예찬한다. 그러나 문장 말미에서는 어떤 마음으로 공직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담는다.

“겉으로 드러난 사물과 자신이 처한 경우를 보며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不以物喜, 不以己悲).” “높은 자리에서는 늘 백성의 처지를 근심하며, 낮은 곳에서는 국가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는 이어 “(공직자는) 그럼 어느 때에야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다. 다음에 그는 “세상 사람이 근심하기 전에 먼저 걱정하며, 세상 사람이 즐거움을 누린 뒤에야 기뻐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명구(名句)로 끝을 맺는다.

지나친 사치를 음사(淫奢)라고 한다. 향락에 눈이 멀어 출구를 찾지 못하는 행태다. 남보다 먼저 호화 아파트와 명품을 구입하고, 남보다 좋은 자동차에 앉을 생각만 하는 이들이 한국 고위 공직자 사회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요즈음의 한 청문회를 보면 더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외형을 장식하는 물질에 탐닉하고, 부(富)의 행렬에서 뒤처질까 늘 걱정하는 사람들. 음사에 빠진 이들에게 고위 공직을 맡긴다면 그에 따른 권력은 어떻게 부려질까. 고위 공직자의 도덕적 수준은 더 철저하게 살펴야 한다.

유광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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