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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IMF시대의 음주문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김승옥 (金承鈺) 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 은 서울의 한 포장마차가 무대다.

당시는 아직 포장마차란 이름이 생겨나기 전이라서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느추운 겨울날 밤 포장마차에서 구청 공무원인 나, 대학원생 안 (安) 씨, 그리고 서적 외판원이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신다.

나와 안씨는 아내의 시신을 병원에 판 돈을 처분하는 데 동참해달라는 외판원의 간청을 받아들인다.

외판원은 화재 현장을 찾아가 돈뭉치를 불속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세 사람은 여관에 투숙한다.

다음날 새벽 외판원의 자살을 발견한 안씨와 나는 도망치듯 몰래 여관을 빠져나온다.

별다른 내용이랄 것도 없는 이 소설이 각광을 받았던 것은 당시 젊은이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4.19로 쟁취한 민주주의는 5.16의 군화에 짓밟혔다.

1964년 여름 굴욕적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고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하며 몸부림쳤던 젊은이들은 비상계엄으로 다시 한번 좌절을 맛봐야 했다.

이같은 암울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개인 차원의 사소한 실천뿐이었다.

음주도시대상을 반영한다.

암울한 시대엔 술자리 역시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희망의 시대엔 즐거움이 넘쳤다.

50, 60년대 어두웠던 시절 사람들은 '취하기 위해' 마셨고, 7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에 들어서는 '즐기기 위해' 마시는 음주풍토가 자리잡았다.

한 주류회사의 사보 (社報) 는 IMF시대의 음주문화를 양극화로 설명한다.

세상 고달픔을 잊으려고 폭음하는 폭주파 (暴酒派) 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경제적으로 술을 마시는 실속파로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실속파 주당 (酒黨) 이 즐겨 찾는 포장마차는 50, 60년대 광목 천으로 비바람을 막으며 참새구이에 소주를 팔던 데서 시작됐다.

그후 70년대 들어 오늘의 포장마차와 비슷한 외양을 갖췄으며, 80년대 들어서면서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이제 마차 수준을 넘어 '길살롱' 으로 발전했으며, 취급 메뉴도 없는 것이 없는 음식백화점 수준에 이르고 있다.

요즘 모든 장사가 불황이지만 포장마차만은 호황이다.

거리 한쪽 공터에 테이블을 10여개씩 내놓은 노천주점식 포장마차까지 등장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적은 돈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포장마차 같은 곳이 있다는 것은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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