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⑦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인데, 불각시에 웬 품앗이야? 내 꼴이 그렇게 심상찮아 보여?" "그게 아니고요. 우리 점포에 시방 난리 났습니다.

승희하고 태호가 분위기 있는 커피 마신다카고 어디로 가서 한참 있다오디 난데없는 서울 가시나들을 셋이나 몰고와서 지금 오징어파티 연다고 화덕에 불 피우는거 보고 형님 찾으로 나선거 아입니껴. "

"서울 가시나들 셋이나 된다해서 너 지금 날보고 짝 맞추러 가자는 게야? 구색 맞추러 가자는 게야?" "아이고, 그게 아이라 카이요. 어수룩한 해변마담 하나도 아금박시럽게 못 꿰차는 형님이 세 마리나 되는 젊은 여우들한테 감히 말이라도 제대로 걸겠어요? 형님한테 그걸 바라는 것이 아니라, 태호가 오랜만에 가시나들을 점포까지 데리고 왔으이, 우리가 가서 분위기를 좀 맞춰주면 그것도 적선 아니겠습니껴. "

"예끼, 이 날강도 같은 놈. 내 나이가 몇인데, 스물 댓살 먹은 철부지들을 보고 아양을 떨란 말여. 태호를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못나설 일이 없지만, 그짓 만은 못하겠어. " "아양 떨어달라는 주문은 아니고요. 장내 청소도 하고 화덕관리도 좀 해주자는 얘깁니더. 아양은 무슨 썩어빠진 아양이라요. 나도 그건 못해요. " "좋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니 가 보자구. 가서 태호란 놈 뒷다리나 들어 줄까. "

변씨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불난 집에 불끄러 가는 사람들처럼 허둥지둥 좌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차일막 근처까지 갔을 때, 벌써 오징어 굽는 냄새가 코를 스쳤다.

20대로 보이는 젊은여자 둘이 비닐봉지에 맥주병을 사들고 저만치 걸어오고 있었다.

승희가 화덕을 차지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반면, 태호는 간이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맥주를 사들고 차일막 안으로 들어서던 두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차일막 안을 휘 둘러보며 말했다.

"얘, 분위기 그만이다, 그치?" 차일막 안에서는 탁자가 놓여지고, 봉환이가 빌려온 의자들이 규모있게 배치되기 시작했다.

변씨까지 합세하는 눈치이자, 태호도 더 이상은 개운찮은 기색만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슬금슬금 거들기 시작해서 그럴싸한 분위기의 식탁이 마련되었다.

여자들은 변씨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으나 봉환과 태호의 태도가 매우 정중했으므로 경계심을 풀 수밖에 없었다.

변씨는 여자들의 이름을 묻고 싶었지만, 태호의 심사를 건드릴까 참고 있었다.

그 중에서 송은주라는 여자가 태호에게 관심을 보이는 눈치가 완연했다.

그녀는 몇 번인가 눌러 쓴 모자 아래로 태호의 기색을 훔쳐보곤 했다.

그러나 해수욕장으로 피서온 계집아이들이 즐기고 있는 방만한 분위기와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준 일시적 호기심이란 것을 변씨는 알고 있었고, 태호도 알고 있었다.

태호가 보이는 거부감도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었다.

그런데도 승희는 상기한 얼굴로 분위기를 좋도록 이끌어 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화덕을 봉환에게 맡기고 탁자에 어울렸다.

그때서야 세 여자는 변씨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알려 주었다.

세 여자는 모두 한 직장의 동료들이었다.

민주라는 여자가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머지 두 여자는 비교적 조용했다.

그러나 소주는 세 여자 모두가 잘 마시는 편이었다.

비오는 날의 해변파티가 시작된 지 30여분이 흘러간 것 같았다.

우산을 받쳐든 고객들이 빗속으로부터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바라지도 않았던 매상이 오르기 시작했다.

고객들이 모여들고부터 세 여자가 화덕에 달라붙어 오징어를 굽기 시작했다.

구워내고 돈 받아 챙기는 일을 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한씨네 일행은 식탁에 앉아 구경만 하는 꼴이 되었다.

화덕의 열기 때문에 세 여자는 물을 뒤집어 쓴 듯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오후 5시쯤 그들은 화덕의 불을 껐다.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