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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 칼럼]서점을 '지식 인프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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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책에 관한 우리들의 경험은 거의 1백% 서점을 매개로 한 것이다.

각급 학교 도서관이나 지역 공공도서관을 이용해본 경험이 없지는 않겠지만 비율면에서는 극히 미미한 정도며 그나마 도서관을 도서관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시험공부방으로 이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니 그런 경험은 통계적으로는 무시해버려도 좋을 것이다.

이는 도서관 수준이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중진국 가운데서도 최말단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다.

4천3백만명이 사는 나라에서 도서관으로서의 기본적인 면모나마 갖춘 공공도서관이 고작 전국적으로 3백70개소 정도인 것이 우리 도서관의 현주소다.

우리들은 거의 모두가 서점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하학길의 서점에서 혹은 집 근처의 작은 책방에서 주인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그러다 때로는 주인의 따가운 눈초리와 정면으로 부닥쳐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하면서 종아리가 붓도록 책에 빠져 들었던 경험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우리는 서점에서 배웠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서점은 실로 성장기의 우리들에게 제2의 학교이자 놀이방이었으며 꿈의 공장이자 세계와 미래를 향한 창문이었다.

서점의 그런 기능과 역할은 오늘에 와서도 30년전이나 20년전과 견주어 볼 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각 지역의 비교적 규모가 큰 서점들은 부족한 공공도서관을 대신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깊어가는 출판계 불황의 골은 그 서점들이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조차 어렵게 하고 있다.

최근 1년새 전국에서 2백여개 서점이 문을 닫았다.

이런 판국에 엎친데 덮친다고 경제부처 일각에서는 책 정가제의 폐지를 검토하고 있어 서점계를 더욱 얼어붙게 하고 있다.

'책값도 다른 상품처럼 시장경쟁원리에 따라야 한다' 는 것이 경제관료들의 생각이다.

정가제가 폐지되면 서점마다 할인경쟁이 벌어져 소비자 부담이 그만큼 낮춰지리라는 것이다.

한 측면만 보면 일리가 없는 생각은 아니다.

미국은 책 정가가 없는 대표적인 나라이고 영국도 지난 95년 1세기를 유지해오던 정가제를 논란 끝에 폐지했다.

그러나 유럽국가들과 일본은 여전히 정가제를 고수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지난 79년 정가제를 폐지했다가 소형 서점들이 경쟁에서 패배해 줄줄이 문을 닫고 그에 따라 전체적인 도서판매량도 줄어 출판사의 도산이 이어지자 2년만에 정가제를 부활했다.

할인경쟁을 하면 소비자 부담이 줄 것으로 예상했으나 할인을 예상하고 출판사들이 출고가격을 높이는 바람에 책값도 오히려 전체적으로 상승하는 예상 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또 다른 상품과는 품격이 다른 문화상품으로서의 책의 권위도 할인경쟁체제에서는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우리의 경우는 어떨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내용과 형식, 그 모든 면에서 날림으로 만든 책이 서점가를 주름잡고 있다.

할인경쟁은 이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며, 더 나아가 군소서점과 출판사의 연쇄적인 도산을 가져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출판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도서관망의 확충을 지적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만약 전국에 최소한 3천개소의 공공도서관이 건립되고 좋은 책을 냈을 경우 그 도서관이 적어도 1권은 사준다면 양서출판이 봇물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1개 도서관 건립에 1백억원이 든다 해도 3천개소면 30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과연 이런 예산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가까운 장래에는 불가능하다는 게 현실적 판단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사회 건설을 국정지표로 삼은 마당에 과도적인 대책이라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한가지 방법은 서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우리 사회의 지식인프라로 만드는 것이다.

이미 일부 대형서점에서는 의자 등을 마련해놓아 자청해 도서관 구실까지 하고 있기도 하다.

소규모 서점이 절대다수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전국적으로 5천1백개소의 서점이 남아 있다.

이들에게 각종 인센티브를 주어 도서관 구실을 하게 해야 한다.

일면적인 경제논리로 그렇지 않아도 빈사상태에 놓인 출판계를 더욱 옥죄는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될 것이다.

서점도 문화 및 지식인프라다.

유승삼(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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