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투자신탁이 예금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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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14일 영업정지된 한남투자신탁증권 사태는 동정 (同情) 과 원칙 사이의 갈등 때문에 지금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럽다.

문제의 핵심은 고객이 이 투신사에 투자신탁한 돈의 원리금을 회사를 대신해 정부 또는 다른 기관이 갚아 주어야 하느냐, 그래서는 안 되느냐 하는 것이다.

종전의 상식으로는 금융기관은 망하는 일이 없었다.

만의 하나 망하더라도 예탁 고객은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그 누군가가 나서 그 돈을 대신 갚아 주어야 하는 것으로 알아 왔다.

이 빗나간 상식이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조치 이후 계속 무너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남투신 고객 보호와 관련된 동정은 이 상식의 그림자가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 그만큼 끈끈하다.

고객 자신의 주장과 분노의 배경에는 여러 특별한 원인마저 겹쳐 있다.

지난해말 폐쇄된 신세기투신의 고객이 구제된 전례와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투신사는 예금자보호 대상에서 범주상으로 제외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세기투신의 고객을 보호조치했다는 것은 잘못된 선례였다.

지역 유지들의 애향심만 있고 책임감이나 사실확인 없는 한남투신 유치광고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남의 재산을 잘못 투자하도록 유인한데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잘못된 것은 투신사 자체의 도덕적 해이다.

고객에게 투신을 일종의 고금리 예금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유인하는 일이 허다하지 않았는가.

금융감독위원회는 이런 점 모두에 걸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가장 강력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 경제의 온갖 주체들로부터 기대를 일신에 모으고 새로 등장한 기관이 바로 금감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여러가지 원인을 방치 내지 제공마저 했다는 추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투신자산은 은행예금이 아니다.

이것을 몰랐다는 것은 최후로 투신에 투자한 고객 당사자의 책임이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수익률은 위험 부담의 대가이고 그 위험은 투자자 자신이 부담하는 '위험의 시대' 다.

원칙대로라면 국민의 세금 또는 다른 투자자의 희생을 자원으로 하는 한남투신 고객에 대한 보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동정론이 우세해 이번 한번만 어느 정도 사실상의 보상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것이 과연 다음에 올 폐쇄 투신회사에 또 다른 선례가 돼 번지지 않도록 완벽한 방화벽 (防火壁) 을 쌓을 수 있겠느냐 하는 판단과 기필코 그 벽을 쌓아야 할 책임은 금감위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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