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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현실 위에 유연한 환상을 짓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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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강원도 정선군에 짓고 있는 펜션의 일부 모습. 문훈 소장은 ‘스페인’을 주제로 한 건물을 화려한 원색으로 칠하고, ‘투우’의 이미지를 살려 장난스럽게 뿔까지 달았다. 문 소장은 이 펜션을 가리켜 “놀이와 결합한 건축”이라고 설명했다. 문 소장은 설계사무실에서 틈틈이 비디오 게임을 즐기고, 설계 아이디어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며 ‘디지털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문훈발전소’ 제공]

서울 논현동 주택가 골목에 있는 건축가 문훈(41·문훈발전소) 소장을 찾아갔을 때 두 번 놀랐다. 온통 빨강으로 칠해진 벽과 책상은 건축가의 설계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점집에 가까워보였다. ‘참, 요란하다.’ 첫인상은 그랬다. 그런데 그 ‘빨간방’에 앉아 방안을 둘러보며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원색적이고 관능적인 분위기의 방은 놀라울 정도로 정리정돈이 잘돼 있었다. 어쩌면 이 풍경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건축과 묘하게 닮은 꼴이란 생각이 들었다. 빨간 커튼과 책상이 그가 꿈꾸는 환상과 욕망을 드러내는 작은 소품이라면, 그 안에 자리한 사물들의 질서정연한 배치는 그 꿈을 현실로 변환시키는 그의 에너지를 대변하는 게 아닐까.

◆펜션, 황소의 뿔을 달다=“강원도 정선의 펜션입니다. 넓은 기단 위에 나란히 ‘보석’처럼 서있는 건물을 만들고 싶었죠.”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펜션. 그는 분명히 “보석같다”고 했는데 엉뚱하게도 건물에는 ‘뿔’이 달려 있다. “여행을 많이 하고 특히 스페인을 사랑한다는 건축주는 펜션에 ‘스페인적인 것’ 을 담고 싶다고 했어요. 스페인의 투우를 떠올리면서 뿔을 달자고 했죠. 건축주가 ‘정말로 뿔을 달거냐?’고 묻긴 했지만 결국엔 뜻을 같이했죠.”(웃음)

모두 5개 동으로 지어진 펜션은 그 자체가 ‘장난감’같다. 빨간 건물은 페라리 같은 스포츠카, 검정색 건물은 부엉이의 눈을 한 스텔스기, 여기에 흰색 갤러리 건물까지…. 바깥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에 발코니와 야외 욕조를 설치했다. 문훈 소장은 이 건물에 텐트같은 재질로 ‘꼬리’도 달 예정이라고 했다.

“건축은 본래 보수성이 본능처럼 내재돼 있어요. 큰 자본이 들어가고, 한 번 지어지면 오래 간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루해지기 십상이에요. 사람들이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는 곳이 약간 낯설고 장난스러워도 괜찮지 않겠어요?”

◆현실과 환상이 만나다=문화비평가 진중권씨는 문훈의 건축을 가리켜 “거울이나 토끼굴을 통해 현실에서 허구로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앨리스의 꿈을 닮았다”고 말한 바 있다. 양평에 지은 주택 ‘S-마할’(2007)도 ‘앨리스의 꿈’ 같아 보인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집주인이 주문해 만들어진 2층 공간의 기도실이 마치 우주인과 교신하기 위한 사설 관제탑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문 소장에게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안겨준 홍대앞 ‘상상사진관’(2005)도 환상과 유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선 ‘S-마할’과 형제처럼 닮은꼴이다. 한 블로거는 ‘상상사진관’에 대해 “항공모함의 통제실같은 덩어리가 건물 꼭대기에 올라 앉았다”며 “어릴 적 보았던 하록선장이나 우주전함 V호”를 떠올리게 한다고 썼다. 문 소장은 “‘가상현실’에 접근했다는 평을 받은 건물들도 사실은 많은 부분에서 타협을 거친 것들”이라고 강조하며 “하지만 현실과 가상세계의 간극을 메우는 이야기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스케일의 힘= 문 소장은 강원도에서 자라 사춘기 시절을 호주 타즈매니아 섬의 호바트에서 보냈고, 인하대 건축과· MIT건축대학원을 졸업했다. 2001년 ‘문훈건축발전소’를 차린 이래 현대고등학교(스튜디오 힘마와 공동작업), 묵동 다세대주택, 전주동물원 등의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최근에 ‘옹달샘’(지하2층, 지상4층)이라는 건물의 설계를 마쳤다고 했다. 나이가 지긋한 건축주는 그를 찾아와 “옹달샘 같은 곳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옹달샘’이란 개념을 “계속 가고 싶은 곳”으로 해석, 중정을 만들어 빛을 지하층까지 받아들이는 곳으로 설계했다.

이 건물은 내년에 착공할 예정이지만 그는 설계를 하면서 ‘옹달샘’ 건물을 주제로 5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설계를 맡을 때마다 2~5분짜리 영화를 만든다는 그는 “건축은 타협의 산물”이기에 “설계를 시작할 때 떠올린 본래의 아이디어를 가장 실체에 가깝게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했다. 문 소장은 “최근 스케일(규모)을 자아내는 공간의 색다른 힘에 매료되기 시작했다”며 “앞으로도 무거운 건축을 가볍게 표현하는 방식을 계속 실험해보고 싶다”고 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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