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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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그들은 비취호텔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창가에 자리잡고 커피를 주문했다.

비 내리는 해변 백사장이 바라보일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으나 대신 비에 젖어 잎사귀가 새순처럼 발기한 작은 잔디밭이 바라보였다.

뜨거운 커피를 반 모금씩 마셔 입속을 적셔가며 사선으로 떨어져 넓은 유리창을 적시는 빗줄기를 헤아리듯 사뭇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웨이터를 불러 덧거리 커피를 시켰다.

"형수씬 한선배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세요?" "그걸 모르겠어요. 그러나 최소한 서울로 가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요. " "그건 나도 마찬가집니다. "

"우리 화제 돌려요. 나중에 철규씨 만나 확인하면 모조리 빗나가고 말 예측과 억측을 지금 여기 앉아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게 미련스럽고 바보스럽지 않아요?" "돌아온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네요?"

"왜 믿고 있는지 아세요?

그 분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예측보다 더 정확한 건 없어요. " 주문하지 않았던 아이스크림 두 개가 탁자에 놓였던 것은 덧거리로 시킨 커피와 함께였다.

돌아서는 웨이터를 불러 세운 사람은 태호였다.

그러나 웨이터가 먼저 까닭을 알아채고 창가로부터는 안쪽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던 세 여자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들이 대접한 것입니다.

태호가 승희를 쳐다보며 눈짓으로만 물었다.

멈칫거리는 웨이터에게 태호는 다시 말했다.

우린 모르는 여자들입니다.

가져가십시오. 난처한 표정의 웨이터를 여자들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깡마르고 키 큰 여자가 일어서 다가왔다.

테이블로 와서 수인사를 건네며 그녀가 말했다.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한데요. 저기 앉아있는 친구가 대접하는 것이거든요. "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다른 여자를 가리켰다.

그때까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여자중에 한 여자가 줄곧 이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눈이 크고 검은 게 인상적이었다.

긴 청바지에 어깨와 등이 훤하게 드러난 민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그녀의 산만한 옷차림 위로 시선이 스쳐가던 태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호의는 고맙지만, 낯모르는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 없어요. 게다가 우린 곧장 일어서려던 참이었습니다. " 그때였다.

아이스크림을 샀다는 여자가 발딱 일어서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여기 잠깐 앉아도 돼요?"

승희가 선뜻 반몸을 일으키며 빈 의자를 밀어주었다.

주홍색 작은 지갑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등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까만색 민소매였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먼저 와서 인사부터 드려야 하는 건데…. 전 송은주 (宋恩珠) 라 해요. 인사는 처음 드리지만, 나랑 모두들 아저씨를 알고 있거든요. 오징어구이도 공짜로 얻어 먹은 걸요. 마침 오셨길래…. " "아, 그랬어요?여기 앉아요. "

승희는 여자의 예민한 감성으로 그녀가 보여준 호의 뒤에 도사린 어떤 예감 같은 것을 느낀 것 같았지만, 태호의 태도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오징어를 공짜로 드린 것은 특정인들을 목표로 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고맙게 생각할 건 없어요. 게다가 공짜공세는 우리들의 상술이었을 뿐이지 선심도 아니었고, 적선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었으니, 이건 도로 가져 가십시오. 최소한 우리에게 먼저 양해라도 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심하게 말하면 이런 것도 폭력입니다.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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