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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프런트] 국내 첫 쇄빙선에 ‘전재규의 꿈’ 싣고 남극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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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요동치는 배 안에서 선원들이 기계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펴본다.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 소속 김익수(50) 선장, 서호선(49) 기관장, 김희수(47) 전기장, 신동섭(40) 전자장 등 선발대로 뽑힌 4명이다.

아라온호는 2003년 12월 전재규 대원이 고무보트를 타고 탐사활동을 벌이다 남극 바다에 빠져 숨지면서 열악한 남극 탐사의 현실이 알려져 정부가 건조에 나선 지 6년 만에 국내 기술로 만든 배다. 남극기지를 갖고 있는 20개국 가운데 한국과 폴란드만 쇄빙선이 없어 그동안 다른 나라의 쇄빙선을 빌려 써 왔다.

4명의 선원은 배의 안전 운항을 좌우할 핵심요원들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이들은 6개월의 시운전을 마친 뒤 한 달 동안 1만5000㎞를 달려 연말 남극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들의 연봉은 1억3000여만원(선장과 기관장)~6000만원(전기장·전파장)선. 남들이 부러워하는 안정된 직장을 뒤로 하고 아라온호에 승선했다.

김 선장은 1984년부터 외항선을 탔다. 천경해운·한진해운 등에 소속돼 브라질·호주에서 철광석을 실어 날랐다. 육상 근무자의 두 배 보수를 받아 어깨에 힘을 주던 시절이었다. 그는 “적도를 넘는 40여 일간의 항해를 하면서 한국을 철강강국으로 우뚝 세웠다”며 남극행에 자신감을 보였다.

서 기관장도 83년부터 배를 탔다. 4명 중 극지연구소에 가장 먼저 들어와 2007년 4월 쇄빙선 건조 과정에 참여했다. 그는 “2003년 말 항해 중 전재규 대원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이 쇄빙선 선원 모집에 응한 계기”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월부터 4월까지 남극 제2기지 구축 답사단의 일원으로 남극을 다녀왔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빙하 위에 고정시키는 닻의 아이디어를 냈다. 두 사람이 20여 년간 외항선을 타는 동안 가보지 못한 바다는 남극과 북극뿐이다. 두 사람은 “산악인이 오르지 못한 산을 오르고 싶어 하듯이 못 가본 바다를 가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 전자장은 정보기술(IT) 분야의 대기업체 연구원으로 일하다 합류한 경우. 봉급이 대폭 줄어드는 데다 집을 오랫동안 떠나 있어야 하는 것 때문에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해양 IT 분야를 개척하고 싶다는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배에 실리는 100여 종, 300억원어치의 전자실험장비를 관리하는 것이 그의 몫이다. 쇄빙선 가격(762억원)의 절반 정도를 그가 책임지는 것이다. 바다 밑 영상을 3차원으로 재생하는 ‘다중채널 음파 탐지기’는 30억원을 호가한다.

김 전기장은 쇄빙선에 전기를 공급하는 변압장치 관리 책임자다. 아라온호의 스크루를 돌리는 동력은 4개의 엔진에 달린 발전기에서 나오는 전기다. 3300볼트를 220∼440볼트로 낮춰 추진 모터에 전기를 공급한다. 실험장비가 가득 실린 쇄빙선은 진동을 줄이려고 전기모터로 움직인다. 그는 전남 광양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전기로 제어하는 하역장비를 담당하다 전직했다.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배도 못 움직이고 연구도 못 해요.” 그는 쇄빙선에서 전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남편들의 바다 생활에 익숙한 김 선장과 서 기관장의 가족은 덤덤하다고 한다. 서 기관장은 “마누라가 ‘왜 빨리 안 가느냐’고 자주 묻는다”고 말했다. 6살짜리 아들을 둔 신 전자장 부인(36)은 “좋은 직장 그만두고 하필이면 남극을 가는지 모르겠다. 출항 날짜가 하루 하루 다가오면서 잠이 안 온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20만t급 상선도 큰 바다에 가면 낙엽이나 다름없죠.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바다는 두렵습니다. 겸손함으로 남극 바다를 만난다면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25년 경력의 ‘바다 사나이’ 김 선장의 다짐이다.

부산=김상진 기자

◆아라온호는=바다를 뜻하는 옛 우리말 ‘아라’에 모두의 의미를 지닌 ‘온’을 합성했다. 모든 바다를 누비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두께 1m의 얼음을 깨며 시속 5.5㎞로 항해할 수 있다. 선원 25명과 연구원 60명을 태우고 연말 남극의 전진기지가 있는 뉴질랜드 크라이스 처지항으로 첫 항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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