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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여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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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여운은 여러 곳에 남는다. 우선 좋은 노래의 끝에 남고, 울림이 있는 말에도 따른다. 사람의 됨됨이가 깊으면 뭔가 곱씹을 만한 뒷맛을 남기고, 깊은 사고(思考)를 담은 문장은 다시 여러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모두 다 뒤에 남아 자취를 남긴다는 의미에서의 여운이다.

그러나 여운은 우선 청각(聽覺)에 대응하는 말이다. 동양에서는 흔히 여음(餘音)이라고 불렸다. 가난했지만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가창력이 빼어났던 어느 한 여성의 이야기에서 이 단어는 비롯했다.

춘추전국시대 한(韓)나라의 여인 한아(韓娥)가 제(齊)나라에 갔을 때 이야기다. 가난했던 그는 제나라의 수도 옹문에서 노래를 부르며 살아갔다. 그가 묵었던 여관 주인이 그녀를 욕보이자 흐느끼며 내뱉었던 울음소리에도 주변 사람들이 함께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 목소리에는 호소력이 담겼던 모양이다.

그가 정색을 하고 부른 노래는 며칠 동안 집안을 헤집고 다녔다. 사람들은 한아가 노래를 부른 뒤에 최소 3일 동안은 무대 위의 대들보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른바 여운이 대들보를 휘감고 돌았다는 뜻의 ‘여음요량(餘音繞梁)’이라는 고사성어에 얽힌 일화다.

설마 그럴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공감대는 청각으로 전해지는 소리에서도 충분히 넓혀진다. 공자(孔子)가 평소 동경했던 주(周)나라의 음악인 소악(韶樂)을 들은 뒤 “석 달 동안 고기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三月不知肉味)”고 한 얘기가 좋은 예다.

거문고의 고수 백아(伯牙)와 그 음악에 공명했던 종자기(鍾子期)도 소리로 함께 통하는 ‘지음(知音)’의 경계에 닿은 사람들이다. 백아가 거문고로 자연을 노래하면 종자기는 바로 “우뚝한 산과 도도히 흘러내리는 물(高山流水)을 느낀다”고 화답할 정도로 둘은 소리와 그 울림으로 통했다.

일세를 풍미한 가객(歌客), 마이클 잭슨의 장례식으로 지구촌이 떠들썩하다. 많은 비행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리의 여운으로 남았다. 청아한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한 ‘아이윌 비 데어(I’ll be there)’는 새삼 지구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어떤 여운을 남길 수 있을까. 제 이름 걸고 버젓이 활동하는 이 시대의 공인(公人)들이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유광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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