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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페미니스트 편지 책으로 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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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백인-중년-부르주아-남자 중심의 질서에 황색-젊은이-노동자-여자가 자리를 잡게 된다고 해서, 그래서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주권시대를 열게 된다고 해서 우리는 행복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조한혜정 교수.연세대 사회학)

"말은 전달되는가. 언어는 반드시 전달된다고 쉽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언어는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폭탄을 투하하는 대신에 언어를 교환하는 것으로 우리는 다음 세대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우에노 지즈코 교수.도쿄대 사회학)

1948년생 동갑내기인 조한혜정.우에노 지즈코(上野 千鶴子) 교수.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 페미니스트인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15년 전. 1988년 크로아티아(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국제인류학회 자리에서다.

40대 초반의 진보적 여성학자로 만난 첫 순간부터 선명한 인상을 주고받았다는 두 사람이 50세를 훌쩍 넘겨 다시 만났다. 지난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두 사람의 생각의 흐름도 달라졌다. 이들이 인생의 통찰을 담은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이번의 만남은 직접 대면이 아니라 '편지 대화'였다. 지난해 1월 일본의 월간지 '세카이'측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두 교수의 편지는 '세카이'와 한국의 계간지 '당대비평'에 나란히 실렸었다. 그리고 1년 반 동안 교환한 편지들이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한국의 생각의나무 출판사와 일본의 이와나미 서점에서 동시 출간됐다. 한국판 제목은 '경계에서 말한다', 일본판 제목은 '말은 전달되는가'다.

'경계'라는 말은 두 지성 간의 대화가 오고가는 지점을 압축한 표현이다. 국가.성별.세대.역사의 경계에 서서 생각을 펼쳐간다. 궁극적으로 그 경계를 넘어 인간 그 자체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은 e-메일을 통해 대화의 주제를 크게 6개로 나눠 조율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선택할 수 없는 조국, 그 근대화의 역사 속에서''여성의 급진성으로 다른 세상 만들기' '우리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가, 다중심성의 세계 만들기'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시대,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기도' '탈근대를 향한 모험으로 뛰어들기' 등이다. '다중심성' '탈근대'라는 표현에서 이들의 달라진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국가.성별에다가 또 좌파-우파로 구분해 사고하던 방식은 옛날 얘기가 돼버린 것이다.

"'모두가 지는 게임'에 포섭된 상황을 가볍게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거대주의와 이분법적 논리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이질적이며 국지적인 움직임입니다. 큰 원형 식탁에 모여 즐겁게 식사하기, 남의 아이 잠시 맡아 기르기, 행복한 동반 여행 떠나기, 이런 운동 같지 않은 일을 하는 이들이 생겨나면서 사회가 소생할 날이 오지 않을까요?"(조한혜정)

"당신은 '양육'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그리고 있고, 나는 '보살핌(care)'이란 유대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를 상상합니다. (노인 등에 대한 재택 간호에 관심을 갖다 보니) 생명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어떻게든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음을 경험합니다. 청소년들이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듯 우리도 포스트모던한 노후라는 모험을 향해 출항하기로 할까요?"(우에노 지즈코)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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