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강대국 외교의 명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정보담당 외교관의 추방과 맞추방으로 경색돼 가던 한국과 러시아간의 관계가 다소 수습되는 것 같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어느 쪽이 더 손해를 보았는지 몰라도 우선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에 상호간의 보복조치가 확대돼 대사를 소환하는 사태까지 간다면 그 원인과 책임에 상관없이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강대국들을 주변세력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외교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다.

냉전기간중에는 우방과 적대 관계가 뚜렷해 우리편에 서주는 나라는 우방이고, 북한 편을 들어주는 나라는 적대 세력으로 갈라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우방과 적의 개념이 모호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됐다. 주변 강대국들이 우리의 안보와 경제에는 물론 통일 전후의 과정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 유지, 그리고 아시아의 경제 위기 극복에 불가결한 존재다.

일본은 현재의 경제적 침체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경제력을 가진 나라다.

중국은 우리에 광대한 시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북한에 어느 정도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으로, 또 과거 북한의 후견자로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우리가 강대국 관계를 운영하는 데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미국 일변도의 사고 방식이다. 특히 오늘과 같은 외환위기 상황에서는 미국과의 관계만을 중요시하고, 그것에만 의존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의 좋은 관계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못된다.

우리로서는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따라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연내에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기로 돼 있고 머지않은 장래에 러시아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도 정상회담을 갖도록 돼 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강대국들, 특히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 중요한 목적을 북한의 견제 및 북한과의 경쟁에 국한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북방정책' 을 추진한 80년대말 우리는 경제력을 활용해 북한과의 외교적 대칭성 (對稱性) 을 깨뜨리려는 (즉 북한과 미.일간의 관계개선에 앞서 우리가 먼저 소련.중국과 수교하는 것) 의도가 적지 않았다.

또 러시아.중국과 외교관계를 가지면서 북한을 견제하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을 1차적인 목적중 하나로 삼았던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과의 관계를 좀 더 포괄적으로 보아야 한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70년대초 '동방정책' 의 이름으로 소련과의 화해를 추구했던 것은 동독에 대한 경쟁으로서보다 앞날 통일된 독일의 입지 (立地) 강화를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분단국 입장에서 뿐 아니라 통일된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한국으로서 생각하기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길고 넓은 안목 필요 우리는 또 이들과의 관계를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보다 장기적인 실리에 입각해 운영해야 할 것이다.

91년 수교 당시 소련에 제공한 차관 (借款) 의 회수 문제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과거 여러해 동안 원금 회수라는 당면 목표에만 집착해 소련과 러시아에 빚을 준 세계 여러 나라들의 협력체인 '파리클럽' 에 가담하는 대신 독자적으로 러시아를 독촉하는 빚쟁이 노릇을 해 왔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로부터 돈도 별로 받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심만 잃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차관을 무기로 상환할 것을 고집하는 바람에 미국과의 안보관계에도 영향을 끼친 바 있다. 우리는 지난날 정부의 외환과 금융정책이 장기적이고 포괄적이지 못해 오늘의 경제 위기가 닥친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외교관계, 특히 강대국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강대국 정책을 길고 넓은 안목을 가지고 수행할 때 효과적인 외교가 가능할 것이다.

한승주(고려대교수.정치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