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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 칼럼]'그리운 금강산'의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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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 그동안 무지무지하게 아까운 나날들 허사로 보낸, 내것이 아닌 미움이던 것 훨훨 날려 버리고… 서로 익어가는 사랑의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방북조사단의 일원으로 금강산을 답사한 고은 (高銀) 시인이 평양에서 보낸 시 '금강산' (본지 7월18일자 1면)에는 벅찬 감격과 함께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을 바라는 열망이 구절마다 배어 있다.

그 절절한 감격과 열망에 감전돼 불현듯 가곡 '그리운 금강산' 이 듣고 싶어졌다.

마침 영화배우 못지 않은 빼어난 미모로 해서 더욱 유명한 루마니아출신의 세계적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가 올해 취입한 '마이 월드' (데카) 란 가곡집에 최영섭곡.한상억작사의 '그리운 금강산' 이 들어 있다.

낱말의 뜻을 거의 이해하고 있는 듯 그녀의 감정표현은 우리 가수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고 발음도 유럽인의 발음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정확하고 또렷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부른 '그리운 금강산' 노랫말은 대결시대에 지은 노랫말이었다.

'그리운 금강산' 은 최영섭 (69) 씨가 지난 61년 KBS로부터 소련.중국.북한동포를 상대로 한 국제방송에도 알맞게 조국강산을 주제로 가곡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상억씨의 시를 노랫말로 해 작곡한 곡이다.

61년 당시엔 북한을 공식적으로도 '북괴' 라고 부르던 때라서 '그리운 금강산' 의 노랫말에 '더럽힌 지…' '짓밟힌 자리' '원한' 과 같은 대결의식과 한 (恨) 이 서린 낱말들이 등장한 것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72년 남북대화가 시작되고 남북예술단교환 등이 논의되면서 이 노랫말은 시대분위기에 맞게 고쳐졌다.

'더럽힌 지' 는 '못가본 지' 로, '짓밟힌 자리' 는 '예대로 인가' 로, '원한' 은 '슬픔' 으로 바뀌었다.

최영섭씨에 따르면 북한을 자극할 것을 염려한 당국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신앙심 깊은 교회의 장로였고 '마음이 비단결 같았던' 한상억씨가 이제는 가사가 달라져야 한다며 고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리운 금강산' 이 수록된 음반이 60여종 되는데 그중 새로 지은 노랫말로 취입된 음반은 6~7종에 지나지 않는다.

꼭 대결의식이나 원한이 남아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무심함이나 대강주의의 결과로 고쳐진 노랫말 대신 원래의 노랫말이 지금도 별 의식없이 그냥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안젤라 게오르규가 부른 노랫말이 그렇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사정에서 연유한다.

데카가 한국 공급원이 될 한국폴리그램에 한국 가곡의 추천을 의뢰했을 때 한국폴리그램 담당자는 별 생각없이 보관하고 있던 개사 전의 가사에 음을 달아 보냈다는 것이다.

시인 한상억씨는 지난 92년 11월 별세했다.

고향 (강화) 까지 같아서 더욱 절친했던 최씨에게 한씨는 별세하기 두달전에도 "이제는 바뀐 가사로 불러야 할 텐데…"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의도적으로 원래 가사를 고집하는 가수도 없지는 않다.

소프라노 이규도씨가 그중 한 사람인데, 그녀는 지난 85년 남북예술단 교환공연때 평양에서 '그리운 금강산' 을 부르면서 '더럽힌 지' 를 '못가본 지' 로 바꿔 부르고 '짓밟힌 자리' 와 '원한' 은 의도적으로 그대로 불러 방문단 일행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고향이 평북 의주라서 한이 서린데다 담대한 편이기도 해서 뒤에 가서는 의도적으로 예전 노랫말을 불러버렸다고 한다.

북한청중이나 당국이 눈치를 못채고 넘어가 버렸지만 그녀 자신은 불안한 나머지 관광도 하지 못하고 호텔방에서 두문불출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분단 반세기는 가곡 하나에도 이렇듯 많은 사연이 얽히게 했다.

'그리운 금강산' 은 분단의 설움을 안은 우리나라와 국민의 상징적인 가곡이 됐다.

88년 서울올림픽기념 문화축전에서 교포가수 넬리 리가 노래를 불러 청중을 함께 울려 버린 곡도 이 곡이었고 지난 6월 9일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 방미때의 백악관 만찬에서 홍혜경이 부른 노래도 바로 '그리운 금강산' 이었다.

그런 만큼 금강산 관광도 논의되는 마당에 이 가곡의 노랫말도 금강산만큼이나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면 한다.

그래야 고은 시인의 호소대로 남북이 똑같이 '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 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유승삼(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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