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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영미씨 "빵도 못 먹어본 내가 빵 선생이 됐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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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탈북자들의 남한사회 진출을 위한 인큐베이터로 불리는 하나원이 세워진지 10주년.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도 1만6000명을 넘어섰다.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하나원 내부를 중앙 SUNDAY가 들어가 봤다.영화 '크로싱'의 조감독으로,내년 초 감독 데뷔 기대에 부푼 김철용씨와, 제과제빵 학교의 교사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탈북 교육생을 따뜻한 언니의 마음으로 가르치고 있는 김영미씨의 남한사회 정착기도 소개한다.다음은 중앙SUNDAY기사 전문.

하나원 72기 김영미(34·가명)씨와 14기 김철용(35)씨. 남한에 들어온 1만6000명의 탈북자 가운데 정착에 성공한 이들이다. 두 사람은 1999년과 97년 북한을 각각 떠났다. 대기근 ‘고난의 행군’ 절정기였다. 남한 생활 각 4년, 9년째. 자신의 꿈을 소중히 가꿔 나가는 두 사람을 일터 ‘빵 학교’와 ‘영화제작사무소’에서 각각 만났다.

“북에서 빵을 먹어 보지도 못한 제가 빵 선생이 돼 있으니 참 재미있죠.” 군포의 현대호텔관광직업전문학교를 찾았을 때 영미씨는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계속될 야간 수업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탈북 후배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인터뷰를 하겠다”며 살아온 길을 들려줬다.

“정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북한을 나왔죠. 함흥의학전문학교(3년제)에 다니고 있었는데 강냉이밥에 절인 무와 미역국 반찬으로 그런대로 나오던 기숙사 식단이 어느 순간 소금물과 강냉이밥으로 바뀌더라고요.” 중국의 친척들이 영미씨라도 건너오라고 했다. 99년 12월 31일 친척이 중국돈 3000위안을 브로커에게 줬고 해주의 집까지 와 영미씨와 영미씨의 어머니를 데리고 국경으로 갔다. 북한 경비에게 돈을 쥐여 준 다음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넜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감시는 심하지 않았죠. 근데 강을 건너니 기슭에 중국 쪽으로 많은 발자국이 있더군요. 탈북자가 진짜 많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영미씨의 어머니는 중국 친척들에게서 돈과 식량을 얻어 이듬해 강의 얼음이 녹기 전인 3월 해주로 돌아갔다.

영미씨는 많은 탈북 여성이 그렇듯 중국에서 그럭저럭 살아남았다. 친척들의 도움이 컸다. “한국 사람과 결혼해라” “한국에 들어가라”고 친척들이 충고했지만 “그때는 한국이 잘산다고 하는 사람은 다 ‘원쑤’로 보였다”고 했다. 그러다 남한 실상도 알게 되고, 중국말도 모르는 천덕꾸러기로 사느니 인간답게 살아 보자며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들어갔다. 8개월 뒤 2005년 7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영미씨는 “하나원을 나온 뒤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남한 사람들의 말이 도무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편견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서울의 한 학원에서 직업훈련을 받는데 다른 수강생들이 “탈북자한테선 냄새가 난다. 왜 탈북자들과 함께 수업해야 하느냐”며 항의하는 통에 그곳을 나왔다. “그곳이 서울에서도 강남이란 걸 나중에 알았지요. 경기도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더라고요.”

영미씨가 마음을 붙이고 독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한 곳은 현대호텔관광직업전문학교다. 새터민 취업을 위해 하나원과 함께 기업 맞춤형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거기서도 수업 따라잡기가 만만찮았다.

“얼굴에 바르는 로션이 크림인데 그걸 왜 빵 만드는 데 쓰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영어 일색인 수업도 전혀 못 알아들어 꼭 동물원 원숭이 같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용기를 내 ‘선생님 크림이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교실 전체가 웃음 바다가 됐지요.” 그날 이후 ‘너 죽고 나 죽자’며 달라붙어 뜻도 모르고 말을 통째로 외웠다. 시험 땐 잠도 안 잤다. 제빵·제과 기능사 자격을 땄고 격려금도 200만원 받았다. 전문학교 강언숙 교장은 영미씨를 탈북자 전담반 교사로 임명했다.

“많은 분이 새터민 가르치기를 힘들어하죠. 문화나 언어 차이가 커요. 새터민들이 기분 좋아 흥분해 소리치는 걸 집단 항의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새터민 25명으로 구성된 민들레반 담임 영미씨는 후배 탈북자들에겐 선생님이자 마음을 달래 주는 언니며 동생이다. “학생들이 ‘이렇게 힘들 바엔 다시 중국에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할 땐 가슴이 정말 아파요.” 영미씨 눈에 눈물이 맺힌다.

“탈북 여성들의 마음엔 피멍이 들어 있을 거예요. 부모·형제와 오래전 헤어진 뒤 두세 번 북송된 사람도 있고 인신매매로 팔려간 뒤 중국인 남편에게 매를 맞다 탈출한 이들도 있어요.” 영미씨는 “한국 정부가 탈북자들에게 정착금을 일시불로 준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며 “요즘 한국에 오는 탈북자들은 변경된 지원제도를 알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보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민들레반 학생인 손정란(26)씨는 “선생님에게서 나도 하면 되겠다는 희망을 본다”고 했다. “통일이 되는 순간 소용돌이가 일겠지요. 그때 제가 남북한 통합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여기 이 자리에서 열심히 공을 쌓아 가겠습니다” 영미씨의 말이다.

철용씨는 탈북자를 소재로 다룬 영화 ‘크로싱’과 ‘국경의 남쪽’의 조감독을 했다. 북한 말투 때문에 영화배우의 길은 접었다지만 강한 억양을 느끼진 못했다. 면재킷 차림, 웃음 띤 얼굴에선 영화판의 세련된 분위기가 드러난다. 영미씨와 달리 그는 정치적 이유로 두만강을 건넜다.

황해도 봉산 출신. 리계순대학 어문학과에서 작문 및 화술을 전공하다 체제 비판적인 리포트를 낸 뒤 퇴학당했다. 혁명화 조치로 광산에도 다녀왔다. 그나마 아버지가 당 관리여서 시간이 흐른 뒤 기업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사고를 쳤죠. 김정일과 김일성의 액자를 깼습니다. 궐석재판에서 총살형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자해 소동 끝에 병원을 탈출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철용씨는 중국에서 1년간 한국 사업가 밑에서 일하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 됐지만 노동집결소에서 다시 탈출했다.

“당시 북한 체제에 반항한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니고,북한이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중국도 제가 머물 곳은 아니었죠.” 그는 2001년 몽골 대통령의 딸이 한국 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몽골로 가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해 무작정 몽골 국경을 향했다. “제가 몽골 사막을 거쳐 울란바토르 한국대사관을 통해 서울에 왔는데 몽고 사막이 그렇게 황량하다는 건 오히려 크로싱 촬영 때 알았습니다.”

하나원을 나온 그는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북한에서도 해주 당기동예술선전대에서 활동했고 배우의 꿈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한의 대학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맨 앞자리에 앉아도 교수님 말을 알아듣기 힘들어 죽겠는데 다른 애들이 계속 떠드는 거예요. 북한에선 생각도 못 할 일이죠. 참다 못해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면서 ‘야, 이XX들아! 이제부터 떠드는 XX는 다 죽여 버리겠다’고 했죠.”

철용씨는 6개월 동안 확실한 왕따를 경험했다. “제가 지나가면 바닷물 갈리듯 학생들이 양쪽으로 쫙 비켜 났습니다. 동갑인 한 친구의 도움으로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학교 생활을 제대로 하게 됐습니다.”

철용씨는 하나원 생활을 얘기하며 “사랑하는 아내를 만난 행운을 그곳에서 얻었지만 못된 짓도 많이 했다”고 했다. 생활 수칙을 붙여 놓은 게시판을 뜯어내고, 외출한 뒤 하나원에 돌아올 땐 가방 검사에 반발해 경비와 몸싸움까지 했다고 했다.

하지만 교육 내용을 충실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게 피가 되고 살이 되더라고 했다. 그는 최근 탈북자들이 과거처럼 절실한 상황에서 한국행을 택하지 않아서인지 의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남한에 정착한 가족이 보내 주는 돈으로 북에서 나름 잘살다가 오는 사람들이 ‘내가 그래도 북한에서 이밥(쌀밥) 먹고 살았다’며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궂은일을 마다합니다. 훌륭한 분도 있긴 하지만요.” 그는 “모든 원인은 자기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한국을 선택했으면 그 사회에 맞추려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남한 사회도 그렇지 않습니까. 충청도 사람이 서울 오면 서울 문화에 맞춰 살 듯 우리도 그래야 되는 거지요.”

“영화판도 사실 노가다(막일)입니다. 저도 정말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AK소총 총부리의 차가움을 등뒤에서 느껴 본 사람들은 못할 게 없는 거죠. 탈북자들이 과거에서 빠져나와 미래를 향해 한국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철용씨는 한국 정착 뒤 가족을 찾으러 고향에 사람을 보내 봤지만 허사였다. 오래전에 추방돼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소식만 들었다. “동생이 서해 함대 381초계함 우등함포사수였는데 2000년 연평해전 때 남한 해군에 완패했다는 그 배입니다. 나 때문에 미리 강등됐었다면 무사할 텐데… 가족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는 “크로싱을 본 많은 사람이 지금 일어나는 일인데도 1960년대의 사건으로 보는 것을 발견했다”며 “현재 북한이 가진 아름다움과 근본적 모순을 보여 주는 작품을 만들겠다”고 했다. 최근 시나리오 작업을 끝낸 ‘바람꽃’이 그것이다. 그의 감독 데뷔작이다. 바람꽃은 ‘벼랑 끝에 홀로 핀 꽃’이란 뜻. 아름답지만 언제 폭풍에 꺾일지 모르는 꽃이란 뜻이다. “최근 탈북한 분 가운데 ‘국경의 남쪽’ 비디오를 봤다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영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대단한 매체입니다. 영화를 통해 남북한 통합 작업이 가능한 겁니다. 통일 후엔 영화 일을 하고 싶은 북한 동포들을 위한 영화스쿨을 만들고 싶습니다.”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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