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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녁스케치]상.평양은 초대형 수목群像圖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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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북한 문화유산답사를 위한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의 2차 방북팀과 함께 지난해 12월 북한을 다녀온 한국화가 황창배씨가 그곳에서의 감회를 글과 그림으로 엮어 본지에 기고해 왔다.

황창배 화백은 최근 연재가 끝난 '최창조의 북녘산하 북녘풍수' 에서 현장스케치에 바탕을 둔 아름다운 그림으로 독자에게 북한의 생생한 모습들을 전해준 바 있다. 黃화백의 글을 상.하 두차례로 나눠 싣는다.

지난해 11월초, 중앙일보측으로부터 문화유적답사차 북한에 다녀오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은 나는 한동안 감전된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유난히 푸르게 느껴졌던 파리의 하늘도, 엊그제 시작한 나의 개인전도, 다음 전시회를 위해 오래 전부터 구상해왔던 작업계획도 이미 내게는 아무런 관심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곳에서 부딪치게 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나의 온 마음과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평양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들뜬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던 중국 베이징 (北京) 공항은 의외로 한적했다.

곳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중에는 북한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같은 핏줄인 그들이 왜 그리 먼 나라 사람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는지….

기내에서 스튜어디스는 친절하고 상냥했다. TV를 통해서나 가끔 접할 수 있었던 특유의 평양식 억양이 실감을 더해 주었다.

그녀의 의상이나 화장법.머리모양.장신구 등은 남쪽에 비해 세련되진 못했지만 반면에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맑은 모습으로 비쳤다.

남쪽에서 왔다고 하며 이것 저것 물으니 그녀는 놀라는 기색 없이 자신의 간단한 사생활, 근무시간 등을 상냥한 표정으로 설명한다. 그 밝은 태도에 그간의 긴장된 마음과 생각들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주변의 풍경은 남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논이며 밭.건물.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신기해 보였다.

평양시내는 며칠 전에 눈이 왔는지 잔설이 이곳 저곳 흩어져 있고 그늘의 미처 녹지 못한 눈 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썰매를 타고 있었다.

무궤도전차를 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듯 어깨에 삽과 곡괭이를 메고 무리지어 오는 사람들, 겨울인데다 저녁 무렵이라 더욱 그렇게 보였겠지만 의상의 색깔은 남쪽에 비해 대체로 어두운 편이었고 그래서인지 마치 엄청나게 큰 대형 수묵 인물군상도를 보고 있는 듯한 압도감에 사로잡혔다. 분주히 움직이며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 북한사람들 한가운데 내가 와 있다는 사실이 꼭 꿈만 같았다.

우리 일행이 묵은 호텔은 평양에서 손꼽히는 최고급 호텔로 30층이 넘는 쌍둥이건물이었다. 숙소는 안락했고 종업원들도 매우 친절했다.

북에 들어가던 날 북측의 저녁 초대로 평양소주.도토리술.룡성맥주를 곁들인 불고기파티를 했다.

외국여행을 할 때마다 음식이 잘 맞지 않고 언어소통도 어려웠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 답사야말로 여러가지로 행복한 여행이 아닐 수 없다.

식사를 함께 한 북측의 여섯명은 우리 일행 다섯명을 안내해 북한에서의 모든 일정을 같이해야 할 사람들이었는데 술 몇잔이 오가자 역시 우리와 같은 핏줄이라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 짜인 계획대로 답사를 시작했다. 답사내용은 최창조 (崔昌祚) 선생의 글로 이미 상세히 설명이 됐지만 실상 나에겐 이번 답사의 목적인 문화유적보다 그것들을 보기 위해 이동하는 중에 펼쳐지는 차창 밖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큰 관심거리였다.

분단 이후 서로 다른 이념과 정치풍토 속에서 그들의 문물 (文物) 은 과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그러나 평양거리를 벗어나 도시외곽에서 보는 풍경은 남쪽의 어느 시골과도 다를 바 없었다.

수확이 끝난 갈색 톤의 흙과 논밭, 그 사이를 지나가는 우마차, 곳곳에 무리지어 땅을 고르거나 다리.길 등을 보수하고 있는 사람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다만 인민학교 어린이의 목에 둘린 붉은 머플러, 주민들의 인민복장, 모자 따위만이 내가 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쳐주고 있었다.

주민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곧 그들과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공감이 되면 웃고 울 수 있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결국 그 기대는 채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남쪽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이곳 북녘의 땅을 밟고 숨쉬어 본다는 것만도 대단한 일 아닌가.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많은 실향민에게는 '배 부른 소리' 로 들릴 것임에 틀림없다.

말로만 들어오던 만수대창작사. 북측단장이 나를 위해 특별히 계획했다는 그곳을 방문했다.

만수대창작사는 인민예술가.공훈예술가들에게 그림.도자기.조각 등을 창작할 수 있게 모든 시설과 재료를 지원해주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미 생활이 보장되고 있는 선택된 예술가들의 집단인 셈이다.

그곳은 꽤 넓은 면적에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돼 있었다. 우리 일행이 먼저 안내된 곳은 김일성 (金日成) 주석을 기념하는 그림을 전시한 곳이었는데 여러 점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그림의 크기에 압도당했다. 그림은 대개 종이 위에 조선화기법으로 그린 것들이었다. 조선화기법이란 조선종이를 여러 겹 배접해 두껍게 만들고 거기에 엷은 아교물을 여러번 발라 말린 다음 다시 흰색 (胡粉) 을 칠한 뒤 그 바탕 위에 그림을 그리는 기법을 말하는 것으로, 남쪽의 채색화기법과 비슷해 보였다.

그들의 사실적 묘사능력과 인물의 드라마틱한 표정, 동작, 배치법 등은 정말 돋보였다.

여럿이 합작한 그림인데도 그 표현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로 인민화가의 지휘 아래 여러 화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그린 그림일 것이라는 짐작이 갔다.

이 그림들의 일부를 사진으로 찍어 후에 남쪽의 몇몇 한국화가들에게 보여주었더니 모두들 그 기법과 표현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단지 표현방법이 단조롭고 어떤 틀 속에 갇혀있는 듯하다는 아쉬움은 있었다.

얼굴.손.발의 피부와 의상 (衣裳) 을 표현할 때는 평면적이며 은유적인 전통 동양화기법보다 서양의 음영법 (陰影法) 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아마 강렬하고도 리얼하며 생동감 있는 표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날 인민예술가인 조선화가 선우영 화백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나 나나 일본에서 매년 열리는 남북평화미술전에 계속 출품해 왔던 터라 화풍과 얼굴이 낯익어 여러번 만났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선우화백도 나를 알고 있었다.

(황창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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