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빚 증가 세계 1위, 출구 전략 고심 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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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호 24면

“법인세와 소득세 감세 중 올해 시행하기로 한 건 놔두고 내년에 하기로 한 부분은 유보하는 게 어떠냐.”(김성식 한나라당 의원)

윤증현 장관, 국회에서 ‘감세 유보’ 흘린 까닭

“그런 제안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사진)

지난달 2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를 주목하게 한 짧은 문답이다. 윤 장관의 발언은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MB노믹스’를 대표하는 3대 정책 중 747(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대운하에 이어 ‘최후의 보루’인 감세마저 흔들리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재정부는 곧바로 “경기 회복이 가시화되는 국면에서 비과세·감면 축소를 포함한 중장기적이고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이라며 “감세 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해명했다. 윤 장관도 이날 저녁 전국경제인연합회 초청 강연에서 “(발언 내용이) 와전됐다”고 했다. 이대로만 보면 해프닝이다.

하지만 이날 회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의 느낌은 달랐다. 한나라당 소속의 한 의원은 “질문과 답변이 모두 명확해 와전될 여지가 없었다”며 “누구라도 정부가 감세 유보를 고려하고 있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취지의 다른 발언도 있었다.

임영호 자유선진당 의원은 “지난해 말 특히 법인세 등을 감세하면 금방 경제가 나아진다는 게 정부 논리였는데 지금 보면 국가 부채만 늘고 기업 투자는 줄었다”고 지적했다. 윤 장관은 “감세가 재정 건전성에만 영향을 주고 당초 정부가 기대했던 기업 투자 부분에서 미흡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며 “내년도 재정 편성 과정에서 크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마음먹고 한 발언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더하는 방증들이다.

재정부 안에서도 “재정 건정성에 대한 걱정이 많은 윤 장관이 여론을 환기하고 반응을 살피기 위해 속내를 비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친시장 못지않게 재정 건전성을 중시하는 그의 소신을 알기 때문이다. 윤 장관은 지난 5월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수요정책포럼에서 “소규모 개방 경제인 우리 경제의 특성을 감안할 때 재정 건전성은 거시경제의 안정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국가 신인도와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재정과 무역 양쪽의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멀쩡할 수 있는 미국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와 재무부 채권이라는 무기를 쥐고 있다. 적자가 아무리 많이 나도 채권을 발행해 메울 수 있다. 한국은 다르다. 달러도 확보하고 재정도 건전해야 외국과의 무역이 원활해진다.

최근 나라 곳간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경기 부양을 위해 돈 쓸 곳이 많기 때문이다. 관리 대상 수지를 기준으로 지난 1분기 재정 적자가 22조원이었다. 올 전체로는 51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국내총생산(GDP)의 3.2% 규모다. 나랏빚은 58조6000억원 늘어난 366조9000억원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GDP 대비 30.1%였던 게 35.6%로 5.5%포인트 치솟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75.4%)보다 아직 훨씬 낮다지만 빚이 늘어나는 속도로 보면 으뜸이다. 반대로 들어오는 돈은 점점 줄고 있다.

지난해 유가 환급금과 경유차 보조금을 감안한 총세수는 약 177조원이었다. 정부는 올해 추경을 포함해 13조원 줄어든 164조원의 세입을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1분기 뚜껑을 열고 보니 목표보다 8조원이 덜 걷혔다. 하반기 경제 사정이 나아진다고 해도 20조원 이상의 차질이 우려된다. 경기가 계속 지지부진을 면치 못한다면 법인세와 소득세 인하가 시작되는 내년 이후엔 세수 감소 폭이 더 커질 수 있다.

감세로 인한 재정 타격이 예상보다 클 것이란 분석도 잇따르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대대적인 감세를 발표하며 세수 감소액을 35조3000억원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국책연구소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감세 규모가 98조원이라는 계산을 내놨다. 전년 대비 세수 감소분만을 따진 재정부와 달리 해마다 누적되는 금액을 모두 더해 나온 숫자다. 국회 예산정책처도 같은 방식으로 세수 감소액이 96조5000억원에 이르고, 전체의 80%가량인 78조원이 내년 이후 3년간 집중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데도 세입을 늘릴 구석은 마땅치 않다. 법인세·소득세와 함께 세입의 3대 축을 이루는 부가세 인상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역풍을 맞았다. 조세감면제도의 폐지·축소는 야당이 ‘부자 감세를 중소기업과 서민 증세로 메우려 한다’고 공격하자 주춤한 상태다. 개인사업자의 반발을 무릅쓰고 전자세금계산서 제도를 도입해도 1조5000억원가량의 세수가 늘어날 뿐이다. 계층 간, 집단 간의 이해관계에 묶여 옴짝달싹하기 어려운 형국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누가 얼마나 부담할지에 대한 정치적 합의가 선행돼야 정부가 재정을 통해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며 “감세 유보 발언은 윤 장관이 정치권에 빠르고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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