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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이번에는 차멀미도 하지 않았던 철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건 간섭받지 않아도 될 권리가 보장된 사적인 일인데, 그런 일을 기분 내키는 대로 까발릴 수는 없지요. 아니래도 비밀이란, 그걸 지키기 위해 타인의 신용까지 빌릴 필요는 없다.

자신의 입만 막으면 되는 가장 손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형님께서 정녕 진정으로 그러시는 것인지, 그냥 농담으로 해본 소린지 그것부터 묻고 싶습니다. 설혹 진정이라 하더라도 어젯밤의 일을 한낱 웃음거리로 만들자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어젯밤에 내가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아야 할 만큼 지저분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

"진정으로 한 말을 고깝게 들었다면, 나도 면목이 없게 되었구만. 하지만,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가. 남들이 얼핏 보기에는 작당해서 이 장 저 장 들쑤시고 다니는 하잘것없는 행상꾼으로 보일 테지만, 우리들끼리 내막을 따져볼라치면, 입에 들어간 콩 한 조각도 다시 꺼내 나눠 먹어온 아삼륙이 아닌가.

슬퍼도 같이 울고 기뻐도 같이 웃자는 게 바로 우리들 모듬살이의 모토가 아닌가. 그래서 한 사람이 갈비뼈가 부러져도 같이 울었고, 밥 한 그릇을 넷이서 나눠 먹어도 배 불렀던 게 우리들 배짱이었지. 우리 모듬살이가 그토록 돈독하게 된 까닭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이때까지 서로가 눈꼽만큼의 숨김도 없었고, 서로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백원짜리 동전이 몇 개라는 것조차 속속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투명하지 않았던가.

서로가 비밀이 없었기 때문에 같이 모여 앉아 보았자, 농담 아니면 할 말이 없을 정도였지.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된 근본이 어디 있었을까. 바로 한선생이 단초가 되어 비롯된 결과였지. 그런데 이제 와서 한선생 혼자 불거져서 개인적이니 뭐니 하면서 혼자 잘난 척하기야?

연세가 환갑이 다되어가는 나는 졸개니까 몰라도 되고, 연하인 한선생은 두목이니까 혼자서만 알고 있어야 맛이라는 배짱이여?"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너무 진지하게 파고들어서 내 입장만 난처하게 만드는군요. 연세가 환갑을 코앞에 뒀다니까 하는 말인데,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어젯밤에 있었던 일쯤은 짐작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또 여기엔 형님과 둘뿐만 아니고, 태호도 듣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결혼도 안한 사람인데, 침대 위에서 벌어진 소상한 내막을 듣고 있으려면, 태호는 얼마나 곤혹스럽겠습니까. "

"태호가 아직 결혼은 못했지만, 여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우리들 몰래 편지를 주고 받다가 형식이한테 들통이 났거든. 그러니까 남의 밥그릇에 코 빠질까 가당찮은 염려는 일찌감치 붙들어 매시고, 죄다 털어놓는 게 도리이고 순리여. 태호도 어엿한 한씨네 행중 사람인데, 들어야 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야. "

곱다시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꼴이 된 철규가 힐끗 태호를 돌아보았다.

낌새를 알아챈 태호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대선배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저렇게 고집이시니, 선배님이 아득바득 뿌리칠 수도 없지 않습니까. " 철규는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롱당하는 기분도 없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씨의 요구가 스스로 솔깃하기도 했다.

가슴 한 구석 어딘가에는 발설의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철규는 그 욕구의 모순성에 스스로 놀라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자동차는 어느새 평창을 지나 영월 인근의 소나기재를 바라보며 달리고 있었다.

성민주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오줄없는 사내로 취급할까.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지금까지는 태호의 운전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던 변씨가 느닷없이 태호를 면박 주었다.

"태호.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뭐가 바빠서 꽁지에 불달린 놈처럼 허겁지겁 차를 몰아? 천천히 가면 누가 때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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