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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 역사기행]중국 뤼순, 우리현대사 원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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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한국의 건국과 함께 북방이 닫혀있었던 탓에 "외국" 이라는 말이 갖는 이미지는 아주 멀고 이국적이고 로맨틱한것이었다. 우리는 90년대에 들어와서 중국과 러시아가 개방되면서 비로소 가까운 외국을 체험하게 된것이다.

러시아워에 서울의 강북에서 강남까지 가는 정도의 시간에 당도할 수 있는 외국의 도시가 있다는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런 도시가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경우라면 더욱 큰 행운이다.

중국 요동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뤼순 (旅順) 이 그런 도시의 하나다.

김포공항서 중국 북방민항에 올라 50분동안 신문보고, 차마시고 나니 다리엔 (大連) 이다. 뤼순은 다리엔의 한 구 (區) 다. 서울~부산 보다 가까운 3백60킬로.

두말할 것 없이 뤼순은 안중근 (安重根) 의사로 유명한 도시다.

안의사는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한일합방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를 암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뤼순으로 압송되었다.

뤼순의 고등법원에서 재판끝에 사형선고를 받고 1910년 3월26일 사형이 집행될때까지 뤼순감옥에서 복역을 했다.

뤼순은 인구 21만. 러시아와 일본이 차례로 개발하고 다스린 역사적인 배경을 반영하여 도시가 개끗하고 반듯하다.

안의사가 복역한 감옥은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있고, 감옥에는 안의사가 들어있던 감방과 그가 교수형에 처해진 지점까지 그대로 남아있어 한국인들의 "감상적인 방문" 을 기디린다.

한가지 부끄러운 것은 아직 안의사의 묘소는 고사하고 시신이 묻힌 곳 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도 일본의 과거사의 망령이 문제다.

한국에서 안의사가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야산의 성역화를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지자 중국에 2백억달러를 투자하고 있는 일본이 중국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베이징 (北京) 당국이 뤼순정부에 안의사 사업 불가 (不可) 를 지시하여 사업은 중단된 상태다.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한 중국의 후진타오 (胡錦濤) 국가부주석이 안의사 묘소찾는 일을 돕겠다고 약속한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우선은 뤼순시가 세울 종합역사전람회관 안에 안의사관 이나 코너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것같다.

뤼순을 꼬리 부분에 달고 있는 요동지방은 역사적으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고구려는 요동지방을 오래 지배했다. 이성계 (李成桂) 의 위화도 (威化島) 회군도 고려의 요동정벌 길에 일어난 정변이었다.

특히 뤼순은 동양 현대사의 원점같은 도시다. 여기는 20세기 동양의 운명을 결정한 러일전쟁의 결전장 (決戰場) 이었다. 러일전쟁으로 일본에서는 두사람의 전쟁영웅이 탄생했다.

육군의 노기 마레스케 (乃木希典) 대장과 해군의 도고 헤이하치로 (東鄕平八郎) 원수다. 도고가 지휘하는 일본 연합함대는 뤼순항을 봉쇄하여 러시아군 극동함대의 발을 묶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뤼순시가지 동북방에 위치한 203고지를 러시아군대가 계속 장악하고, 산정 (山頂) 의 포대는 나바론의 요새같아 뤼순함락은 쉽지가 않았다.

그때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대서양과 인도양과 태평양을 건너 다리엔으로 오고 있었다. 일본군은 발틱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뤼순을 함락시켜야 했다.

노기는 1904년 9월부터 5개월 동안 일본군 병사 2만명을 죽여가면서 돌격전을 벌인 끝에 이듬해 1월에 203고지를 점령했다.

뒤이어 일본 해군은 뤼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섬멸하여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발판을 만들었다. 발틱함대가 천신만고 끝에 쓰시마 (對馬島) 해협에 도착했을 때는 뤼순은 함락된 후였다.

그래서 발틱함대는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동해를 북상하다가 울릉도 근해에서 일본 연합함대에 전멸되고 말았다.

곧이어 만주대륙의 봉천회전 (奉天會戰)에서 일본군이 세계최강이라는 러시아 육군의 부대를 무찔러 아시아의 강자 (强者)가 되고 한국의 국권 (國權) 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은 한반도 장악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뤼순은 한국 현대사의 원점 (原點) 의 하나이기도 하다.

뤼순은 우리에게 좋은 역사공부의 현장이다. 다리엔 공항에서 뤼순까지는 자동차로 30분거리다.

여행중 회포를 풀일이 있으면 인구 5백만의 아름다운 도시 다리엔에서 하루 이틀 묵으면 된다. 동남아 섹스관광이나 골프여행 그만하고 건전한 뤼순 역사탐방으로 관심을 돌리면 IMF 조기졸업에도 도움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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