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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중도의 실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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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명박 대통령이 이념적 갈등에 대한 처방으로 중도 세력의 강화를 내놓으면서, 중도에 대한 논의가 갑자기 활발해졌다. 일상 생활에서 중도는 온건한 태도를 가리키므로, 그것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일단 좋은 반응을 얻는다. 서민들을 위한 정책들을 펴겠다는 이 대통령의 약속과 결합하면서, 그의 ‘중도강화론’은 상당한 운동량을 얻었다.

아쉽게도, 그의 중도 정책엔 허술한 면들이 있다. 오랜 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낮은 지지도를 올려야 할 필요에서 급히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근본적 수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좌파 이념과 우파 이념이 대칭적이라는 가정이다. 이념을 논의할 때, 우리는 이념들을 하나의 스펙트럼에 배열하고 양쪽의 이념들이 대체로 대칭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특정 사회의 맥락에서 이념을 다루게 되면, 이런 대칭은 무너진다. 어떤 사회든 특정 이념을 자신의 구성 원리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성 원리가 된 이념은 정설의 지위를 차지하고 다른 이념들은 모두 이단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회 기구들은 정설과 이단 사이의 비대칭을 공식화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헌법은 ‘자유민주적 질서’를 지향했다. 자연히, 우파라 불리는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의 정설이다. 다른 이념들은, 좋게 얘기해서, 잠재적 대안들일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도란 말은 일상적 의미를 잃는다. 정설과 이단의 중간이라는 자리는 존재할 수 없다. 정설을 받아들여 정설의 일부가 되거나, 거부해서 이단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정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헌법의 규정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당연히, 대통령은 자신의 이념적 좌표를 중도에 둘 수 없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라고 선서한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할 책무가 있다.

현실적 차원에서도 자유민주주의의 중심에서 벗어나 중도로 옮겨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요즈음 자신이 본래 지녔던 이념에서 벗어나 중도적 정책을 펴서 성공한 정치 지도자들이 자주 거론된다. 찬찬히 살피면, 그들의 이념적 이동에서 중요한 것은 중도라기보다는 움직이는 방향임이 드러난다. 그들은 원래 정통적 사회주의자들이었는데 집권한 뒤에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호의적인 정책들을 펴서 성공한 것이다. 중국의 덩샤오핑, 영국의 토니 블레어, 인도의 ‘국민회의당’, 그리고 브라질의 룰라 다 시우바는 익숙한 예들이다. 중국과 영국의 경우, 이념적 이동은 중도에 머문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자유주의의 완전한 수용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가 다른 체제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므로, 그들의 성공은 당연하다.

이제 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해서 발전해온 사회에서 거꾸로 중도로 가려 한다. 이렇게 방향을 잘못 잡은 움직임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중도는 뚜렷한 이념이 아니라 이념의 결핍이다. ‘제3의 길’은 없다. 이념적 분열은 가치의 귀속처와 사회 조직에 관한 차이에서 나온다. 우파는 개인들이 가치의 궁극적 귀속처라고 보고 재산권과 시장 기구를 중시한다. 좌파는 가치는 사회에 귀속한다고 여기며 국가를 통해서 사회를 운영한다. 이렇게 양분된 상황에서 다른 이념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중도에 속한 사람들은 이념적 동질성을 지니지 못하고 응집력을 지닌 집단을 이루지 못한다. 실은 그들의 대부분은 이념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적은 사람들이고 체제의 유지에 마음을 쓰지 않는 무임승차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뚜렷한 정체성과 정치적 일정을 지닌 집단으로 만들어 정치 기반으로 삼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온 열정적 자유주의자들을 외면하고 중도 세력이라는 허상을 좇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되기 어렵다.

물론 이 대통령은 중도강화론을 정치적 수사로 여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정치적 수사로서 그것은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성공적 수사에 너무 많은 것을 걸 위험이 있다.

더욱 큰 위험은 이 대통령이 중도강화론을 진정한 개혁을 외면하는 구실로 삼을 가능성이다. 지금 그가 할 일은 인재들을 널리 구해서 쓰고 분열된 여당이 다시 통합되어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개혁을 늦추거나 회피하는 구실로 쓰인다면, 중도강화론은 이 대통령 자신에게나 우리 사회에나 재앙이 될 것이다.

복거일 소설가

◆약력=서울대 상대 졸업. 『비명을 찾아서』 『애틋함의 로마』 등의 작품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