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21세기 정치학-한·일 개혁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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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2일 올림픽 파크텔에서 한국과 일본의 주요 정치학자들이 대거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백영철).일본정치학회 (회장 사사키 다케시.佐佐木毅)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한 이번 학술회의에는 한.일 양국의 현안과 협조를 세계사적 맥락에서 풀어보려는 학자들간에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 중에도 오랫동안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면서도 일본 정치학계 원로로 대접받고 있는 이시카와 마스미 (石川眞澄.63) 교수가 특히 관심을 끄는 인물. 지난 57년부터 39년간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일본정치 관련 기사 및 칼럼을 썼고 96년부터 일본 니가타정보대학 학부장을 지내고 있다.

일본 전후 정치사를 자료 중심으로 체계화한 '전후정치' (岩波刊) 는 국내 한.일관계 및 일본정치 연구자들에게도 필독서가 될 정도다.

'21세기 정치학의 전망과 한.일 정치개혁의 과제' 라는 주제를 놓고 윤정석 (중앙대.정치학) 교수와 대담을 가졌다.

윤 = 한.일 모두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후진성에 기인한 것이다.

국경이 사라지는 세계화 시기에 정치도 세계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유럽통합이 정치적 세계화를 자극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젠 인터넷을 통해 정치에 관한 정보가 넘쳐나고 있어 정치학이 인터넷에 의해 포위되고 있다.

이시카와 = 현재의 위기는 국제금융자본이 작위적으로 일으킨 측면이 있다.

그러나 21세기 정치는 과거와 달라야 한다.

국경이 사라진 환경.기술의 세계와 같이 정치도 초국가적 협력이 필요하다.

윤 = 세계화가 불가피한 현실에서 한.일 관계도 새롭게 정립돼야 한다.

지금까지 양국간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해온 측면이 없지않다.

이젠 한.일관계도 다자주의적 질서 구축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이시카와 = 앞으로 비대한 미국의 존재가 문제될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이 대립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때 한.일 양국이 어떻게 관계를 형성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객관적으로 중국의 세계적 역할은 더 커질 수 밖에 없지만 한.일도 일정한 역할이 있을 것이다.

윤 = 최근 일본 정치학이 국가제도 중심에서 개인의 평등.인권 등으로 사고방식이 변하고 있다.

원래 명치유신 이후 유럽의 대의제를 수용해 근대화를 추진해왔으나 자유.평등 등 개인적 가치에 대한 고려가 적었다.

이시카와 = 모든 것이 세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치적으로 보면 일본은 좁은 나라다. 김대중 집권 직후 일어난 어업분쟁은 국익만을 고려한 처사다.

그것이 과연 일본 국익을 위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서구화였다.

그런데 서구의 제도를 옮겨놓는 것을 서구화로 잘못 이해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일고 있다.

시민단체들이 활발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정치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야 NGO관련 법률이 통과돼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정도다.

낮은 투표율에서 나타나듯이 대의제에 대한 불신과 관료제도의 붕괴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윤 = 최근 아시아 경제의 위기로 아시아적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유럽학자들은 오히려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헌팅턴의 지적 처럼 서양적 가치를 위협하는 문명충돌을 우려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방어적 관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경우 해방후 급작스럽게 공화제가 도입돼 개인생활과 조직생활에 유교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시카와 = 일본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근대적 보편가치를 추구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천황제를 선호하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

명치유신을 통해 전통과 급격하게 단절되면서 아무런 반성없이 근대화는 곧 서구화로 파악해 서구의 제국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성하지를 못하고 있다.

일본정치학을 근대화한 이론의 선구자인 마루야마 마사오가 독일과 비교하여 불가피성만을 강조할 뿐 자신의 책임을 묻지 않은 '무책임의 체계' 로 일본을 평가한 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근대를 제대로 실현한 것이 아니다.

'아시아적 가치' 란 것도 개발독재의 논리이며 일본 명치유신이나 박정희 개발독재에서 나타나듯이 인권과 민주를 무시하는 강권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다.

윤 = 근대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한.일 모두 '투명성' 이 중요하다.

'투명성' 은 민주화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한.일 모두 정치개혁을 선거구 제도 개혁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이시카와 = 일본 정치개혁의 최대문제는 부패다.

이를 개혁하지 않으면 국제적 신용을 얻을 수 없다.

윤 = 서양인의 신뢰를 받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

한국은 '밖' 을 너무 의식하지 않아서 문제다.

일본이 '밖' 을 지나치게 의식하다보니 오히려 서양이 신뢰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외압으로 활용하는 것 아닌가.

또 그런 태도가 아시아를 무시하는 태도가 아닌가 하고 아시아로부터 의심받고 있는 것 아닌가.

이는 한.일관계를 풀어가는데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시카와 = 더 큰 문제는 안전보장을 미국에 의존하면서 '일국번영주의' 만 추구하면서 국제적 역할과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은 전후 (戰後)가 없고 한국은 전후가 시작되었다" 고 말한 적 있다.

이는 한국을 비판한 말 같지만 일본을 비판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인의 의식에는 아직 과거사를 반성하는 전후처리가 미흡하다.

오히려 그 '역풍' 이 우려된다.

그러나 우파의 의견을 대변하는 이같은 분위기가 일본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리=김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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