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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역사' 한국어판 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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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근대 시민사회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프랑스혁명. 자유.평등.박애를 부르짖으며 절대왕정을 무너뜨렸지만 그 혜택은 남성에게만 돌아갔다.

1804년에 공포된 '나폴레옹 민법전' 은 "남편은 대화를 나눌 때 아내를 지배하고 있는 전반적인 정신과 함께 남편 외부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알 권리를 갖고 있다" 고 기록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지난 91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동시에 발간돼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던 '여성의 역사' 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다.

고대 신화부터 현대까지 3천여년에 이르는 인류사를 여성의 입장, 정확히 말해 남녀의 관계사라는 잣대로 재해석해 현대 여성학 연구의 결정판으로 평가받는 노작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걸출한 중세학자인 조르주 뒤비 (1919~96) 와 여성학 연구에 독보적 연구를 자랑하며 지난해말 방한한 적이 있는 미셸 페로 (1928~)가 총감독을 맡고 프랑스.미국.독일 등 6개국 전문학자 67명이 참여해 3년여의 작업 끝에 마무리됐다.

첫권이 나올 무렵 여성운동가들이 직접 트럭을 몰고 책을 팔러 다녔고, 프랑스 교육방송에선 사흘 연속 토론 프로그램을 방영할 정도로 많은 화제를 몰고 오기도 했다.

'여성의 역사' 한국어판이 도서출판 새물결에서 출간되기 시작했다.

전세계로는 14번째 번역. 전5권 가운데 우선 '19세기편 - 페미니즘의 등장' 이 두 권으로 묶여 나왔고 나머지도 내년까지 속간될 예정이다.

가장 큰 특징은 문학.미술.종교.패션.성생활.의학.법학 등 사회 전분야에 걸친 여성의 위치와 조건, 그리고 역할과 권한을 속속들이 찾아냈다는 점.

또한 여성의 권익향상을 교리 (敎理) 처럼 외치는 공격적 페미니즘과 달리 남녀는 평등하다는 기본 전제 아래 역사 속 남녀관계를 차분하게 반추해 다양한 해석의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역사는 여성을 남성의 보조자이자 인류라는 종 (種) 을 재생산하는 대리인이라는 이미지를 쌓아왔다는 사실에 십자포화를 쏘고 있다.

이번에 번역된 19세기편은 이같은 단면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이후 성공한 남성들은 자신의 포부를 과시하려고 여성에게 과다한 의상과 장신구를 요구, 당시 여성의 스커트 단은 지름이 3m에 달했고 때문에 옷 한벌에 30m 이상의 천이 필요했다고 꼬집고 있다.

단지 아쉽다면 저자들의 고백대로 동양.중남미.아프리카의 여성사가 빠졌다는 사실. 이 빈 공간을 메우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일 것이다.

성균관대 정현백 교수 (서양사) 는 "서구 여성의 일상을 정치 (精緻) 하게 복원해 한국 연구자들의 지적 열정을 한껏 부추기고 있다" 고 평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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