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병상의 시시각각

역사는 반복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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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우리는 미국을 형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종이 1897년 한국 공사로 부임한 미국인 의사 알렌을 접견하면서 한 얘기다. 고종은 알렌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애타게 호소했다. 미국 공사관에 피신하게 해 달라고 두 차례나 부탁했다. 모두 거절당했다.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부통령 후보 시절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루스벨트의 일본 사랑은 점점 더해간다. “동양의 발전은 일본의 사명이다. 일본의 승리는 세계의 행복이다.” 러일전쟁 직전 한 말이다. 루스벨트는 백인우월주의자다. 단 하나의 예외가 일본이었다. 유색인종 가운데 일본인만 유일하게 앵글로색슨 같은 문명인이라 간주했다.

물론 미국 외교의 제1 척도는 자국의 이익이다. 국제정치에서 강대국이 고려해야 할 독립변수는 강대국뿐이다. 미국은 일본을 후원함으로써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려 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것을 묵인해 주는 대신 미국은 자신의 식민지(필리핀)에 대한 일본의 포기각서를 받고자 했다. 1905년 미·일 사이에 체결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그 결실이다. 밀약으로 한반도의 식민지화는 사실상 완결됐다.

해방 역시 미국이 가져다주었다. 미국이 일본을 물리치면서 식민지 독립이란 원칙을 세웠다. 단, 한국인들에겐 자치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상당 기간 신탁통치를 한다는 전제다. 그러다 계획을 바꿔 38선을 그은 것도 미국이다. 일본이 생각보다 일찍 항복했고, 소련군이 너무 빨리 한반도에 진입하자 절반이라도 차지하겠다는 생각에서 허리를 잘랐다. 그 어느 과정에서도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독립변수로 고려되지 않았다.

꼭 59년 전 오늘 전쟁을 일으킨 것은 북한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운명은 여전히 미국의 결심에 좌우됐다. 스탈린이 남침 계획을 승인한 결정적 배경은 미국의 애치슨 라인이다.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반도는 제외한다’고 발표하자 스탈린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미국은 참전했고, 38선 넘어 진군함으로써 중국의 참전을 초래했고, 이승만 정부의 북진 통일 주장에도 불구하고 휴전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도 당사자인 한국보다는 강대국의 이해가 먼저였다.

불행의 역사가 어른거리고 있다. 최근 북핵 문제가 미국이 참을 수 있는 한계에 닿았다. 두 가지 점에서 이전과 차원이 다르다. 첫째, 북한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했다. 미국을 직접 핵 공격할 능력을 곧 보유할 수 있다. 둘째, 북핵이 협상용 카드가 아니라는 미국의 판단이다. 적당한 보상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전과 다른 근본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오바마 정부의 판단이다. 최악을 상정하는 군사적 대응은 이미 시작됐다. 최근 미국이 성공한 공중 발사 레이저는 북한 미사일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비행기에서 레이저를 쏴 미사일을 폭파시키는 방식인데, 사정거리가 짧아 북한 이외 핵 보유국들엔 사용하기 어렵다. 새 유엔 결의안에 중국이 협력하기로 약속했기에 북한 선적 강남호에 대한 추적은 흐지부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6·25 아침에 역사의 되풀이를 우려하는 건 비극이다. 대한민국은 60년 전 신생독립국, 혹은 100년 전 봉건왕조가 아니다.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을 수 있다. 위기를 직시해야 한다. 지난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 미국 측 관계자가 “한국은 왜 북핵 위협에 무감각한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모든 국민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병상 편집국장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