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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일본 극우망령 부활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점령군 사령관으로 일본을 통치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45년 당시 일본 사람들의 정치적인 나이를 12세 정도라고 말했다.

군국주의자들이 이끄는 대로 미국을 상대로 겁도 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침략한 일본의 만용이 철든 국민의 행동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를 것이다.

지금 일본 전국의 영화관에서 상영중인 '프라이드 - 운명의 순간' 이라는 영화는 이 궁금증을 풀어주는 하나의 자료가 될 것 같다.

'프라이드…' 의 주인공은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 다.

그는 관동군 참모장 시절 중국 침략을 기획하고, 총리가 돼서는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이다.

그는 도쿄전범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이다.

영화 '프라이드…' 은 그런 도조를 법정에서 미국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고독한 영웅의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태평양전쟁은 서양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피치못할 전쟁이었고, 도쿄전범재판은 승자의 논리로 패자를 심판한 말도 안되는 정치쇼라고 주장한다.

중국과 북한이 비난성명을 내는 가운데 28명의 중의원들을 포함한 일본 우익진영에서는 이 영화가 잘못 알려진 도조의 역할과 태평양전쟁의 의미를 바로잡아 줄 것이라고 대단한 환영분위기다.

일본에는 진작부터 수정주의사관 (史觀) 이라는 것이 있다.

보수우파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태평양전쟁을 일본의 생존을 위한 숭고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영화를 만드는데 우익 사업가가 재정지원을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영화는 특히 도쿄재판이 미국의 각본에 따라 진행된 난센스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은 이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 같다.

미국과 유럽 신문들이 이 영화를 일제히 비난하고 나선 것도 이 영화가 보수우익세력의 발호와 수정주의사관의 공세를 촉발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난세에 백성들은 영웅을 고대한다.

일본사람들은 90년대초 이래의 불황과 엔화가치의 폭락으로 엄청난 박탈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다. 거기에 미국으로부터는 경기회복을 위해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압력이 가중된다.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요 우파공세가 먹혀들 분위기다.

자민당 소속 참의원 의원이었고 저명한 작가인 이시하라 신타로 (石原愼太郎)가 일본의 만성적인 불황과 엔저 (低) 현상은 일본과 아시아를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미국의 음모 때문이라면서 일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본사람들의 불안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A급전범 도조는 영웅으로 부활하는가.

태평양전쟁은 재평가될 것인가.

히로시마의 어느 한국식당에서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게 된 이케다 유키히코 (池田行彦) 중의원의원 (전 외상) 은 도조 재평가나 부활의 가능성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영화 한편으로 여론이 바뀌고 정치의 방향이 바뀔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2차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어떤 의미에서 영웅이었을지 몰라도 도조는 영웅이었던 적이 없어요. 이 영화 제작자는 내가 잘 아는 히로시마 출신인데 그는 돈 벌자고 이 영화를 만들었을 뿐 이데올로기적인 동기는 없었습니다. "

보수진영의 지식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볼까. 태국 주재 대사 출신에 오카자키연구소 소장인, 오카자키 히사히코 (岡崎久彦) 는 2차세계대전과 도조에 관한 수정주의사관의 존재를 인정하고 도쿄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도 그렇다고 도조가 영웅으로 되살아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이런 영화를 통해 비판받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한데 대해 당연히 치러야 하는 대가라고 말했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히로시마 핫조보리에 있는 도에이극장의 좌석은 3분의1 정도가 비어 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50대의 여인은 영화를 보면서 자꾸 흐느껴 울다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금방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감정 정리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녀같이 일본의 많은 보통사람들은 영화 '프라이드…' 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도쿄재판에 관한 공정성 논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일부 일본인들의 열광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역사의 작은 각주 (脚註 : footnote) 로 끝날 것 같다는 게 많은 일본사람들의 생각이다.

한가지 걱정은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역사를 객관적인 사실 위주로 직시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마당에 이런 영화가 젊은이들의 시각과 정서를 오염시키면 일본의 과거 청산은 그만큼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좋은 국민, 나쁜 국민이 따로 없다.

그 나라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적 연령' 에 달렸다.

일본경제가 지금 이상으로 악화되지 않고 외부로부터 새로운 자극이 없는 한 영화 '프라이드…' 의 제작의도가 실패할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다행이다.

일본에서도 국민들은 그만큼 성숙했다.

한국정부가 이 영화에 대해 항의성명 같은 것을 내지 않은 것도 어른스러운 일이다.

김영희 대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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