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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씨 방북하던날]선봉에 선 암소 '은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정주영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 (訪北) 한 16일 오전8시 통일대교앞 환송식장. 鄭명예회장이 환영 인파에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1차로 북송되는 소떼 5백마리의 '선봉장' 인 한 암소의 목에 오색 화환을 걸어 주었다.

이 암소는 트럭에 실린 다른 소들과 달리 비록 10여m에 불과하지만 임진각을 바라보며 남북화합의 행진을 하는 '영광' 도 누렸다.

2년5개월된 이 번식우의 귀띠에 적힌 관리번호는 '717' .하지만 이 소가 자라던 충남 서산농장에서 불리던 애칭은 '은서' 였다.

서산농장 목부 이경훈 (李京勳.29) 씨가 정성스럽게 돌봐주기 위해 생후 2개월 남짓한 딸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반세기의 두터운 벽을 깨는 상징적 존재 아닙니까. 그래서 딸아이 이름을 부르며 자식같이 애지중지해왔지요. "

현대측은 鄭명예회장의 방북이 본격 추진된 지난달 초부터 통일염원의 이미지에 가장 알맞은 '으뜸 통일소' 를 고르기 시작했다.

북한의 수소와 합방, '통일 송아지' 를 잉태할 수 있는 암소를 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 서산농장에서 성질이 가장 온순하고 몸무게 4백50㎏으로 듬직한 '맏며느리감' 은서가 뽑혔다.

방북의 상징으로 암소가 선택된 데는 鄭명예회장 개인의 인생사도 참작됐다고 현대측 관계자는 귀띔했다.

강원도 통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鄭명예회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암소를 판 돈 70원을 몰래 갖고 가출했다.

소판 돈이 국내 정상의 대기업을 이룬 '종자 (種子) 돈' 이 된 셈이다. 이런 연유로 은서는 鄭명예회장과 통천까지 길을 함께 하게 됐다.

李씨는 "은서는 출발전 몇주동안 아주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고 말했다.

"탈이 날 수도 있어 가장 부드러운 풀만 먹였습니다. 일반 소와 따로 관리하며 건강.위생상태를 매일 점검했지요. " 은서는 또 '막중한' 역할을 실수없이 수행하기 위해 '인간 친화과정' 을 거쳤다.

인파가 몰려들고 여기저기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환송식장에서 놀라 날뛸 수도 있기 때문.

그래서 李씨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연인을 대하듯 다정히 말을 걸며 쓰다듬어 주었다고 한다.

1주일 정도 이런 정성을 보이자 "은서야 - " 하고 부르면 반가운 듯 눈을 껌뻑거리며 "음매" 할 정도로 친해졌다고 李씨는 소개했다.

"자식 시집보낸 듯 서운한 느낌" 이라는 李씨는 이날 오후 통일대교 환송식장에서 집으로 돌아가 '진짜' 은서를 안아주며 말했다.

"은서야, 북으로 간 은서가 꼭 통일의 씨앗을 뿌리게 될거야. "

서산.서울 = 이석봉.김일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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