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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정포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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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올해 50세 생일을 맞았지만 외모는 여전히 10대 후반인 그녀. 바로 바비 인형이다. 36-18-33인치인 그녀의 지나치게 ‘착한’ 몸매가 거식증을 확산시킨다는 우려가 나올 만큼 소녀들에게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1992년 7월 선보인 ‘말하는 바비’가 “수학은 너무 어려워”라고 종알대자 미국이 온통 들끓었던 이유다. ‘여자는 남자보다 수학에 약하다’는 편견을 강화시켜 여학생들이 수학을 더욱 기피하게 만들 거란 비난이 빗발쳤다. 결국 제작사인 마텔은 공식 사과와 함께 바비가 다신 그 말을 입에 못 올리게 했다.

그럼에도 여학생들의 수학 성적은 지금껏 남학생보다 낮은 편이다. 지난해 5월 학술지 ‘사이언스’엔 40개국 청소년들의 ‘2003년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를 분석한 결과 남학생들이 수학에서 평균 10점 차로 여학생들을 앞섰다는 논문이 실렸다. 흥미로운 건 국가별 편차가 심하다는 점이다. 스웨덴·노르웨이 등 남녀평등지수가 높은 나라는 여학생의 수학 성적이 남학생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았다. 반면 평등지수가 낮은 터키는 남녀 간 점수 격차가 23점이나 났다. 논문 저자들은 이를 근거로 “남녀 간 수학 점수 차는 천성(nature)이 아닌 문화(culture)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성 평등 의식이 높아 ‘여성=수학꽝’ 식의 고정관념을 탈피한 나라에선 여학생들도 얼마든지 수학짱이 될 수 있다는 거다.

한국은 과연 어떨까. 터키·이탈리아와 함께 남녀 간 점수 차가 가장 큰 편에 속했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여학생은 문과, 남학생은 이과 식’의 선입관을 고려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여학생 중 이른바 ‘수포생’(수학 포기 학생) 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도 그래서일 터다. 입시철 포털 지식검색엔 “수포생인데 인서울(서울에 있는 대학) 갈 수 없느냐”는 질문이 넘쳐난다. 미안하지만 답은 뻔하다. 힘들다.

변신의 기로에 선 우리 대통령이 수포생의 비애를 보면서 교훈을 얻는다면 좋겠다. 대통령에게 정치·외교·경제는 ‘국영수’나 매한가지니 말이다. ‘경포대’(경제 포기 대통령)도 못 쓰지만 ‘정포대’(정치 포기 대통령) 역시 곤란하다. 여학생들은 편견의 굴레를 넘어 수학을 정복해야 하고, 대통령은 혐오감에서 벗어나 정치와 맞닥뜨려야 한다. 수학도 정치도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