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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對러 경협 썰물 문제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최근 한국정부는 한.러 경제공동위원회의 한국측 위원장 자리에 차관급을 앉히려 했다.

러시아측에서는 부총리가 맡고 있는 자리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러시아내 한국사회가 들고 일어났다.

러시아주재 한국대사관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공문을 보내 이 사건은 일단 가라앉았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는 이 사건이 현 정부의 단견적인 대 (對) 러시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며 안타까워 한다.

요즘 모스크바에서는 한국이 과연 장기 외교전략이 있는 나라인가라는 비아냥 섞인 질문마저 던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북방외교 운운하며 그렇게 열렬히 옛 소련과의 수교에 나섰던 국가가 어떻게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하루아침에 썰물처럼 이곳에서 빠져나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실제로 요즘 모스크바에 한국은 없다.

국제통화기금 (IMF) 지원체제에 들어간 후 한국의 위상은 급전직하했고 한국기업들의 철수가 줄을 잇고 있다. 한국기업들의 매출도 급감하는 추세다.

반면 러시아에서 일본기업들의 기세는 갈수록 등등해지고 있다.

한국기업들의 적극공세에 자극받아 절치부심하던 일본은 지난해 11월 크라스노야르스크 러.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본수출입은행을 앞세워 10억달러, 20억달러씩 차관제공을 내걸고 러시아시장을 마구 헤집고 다닌다.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의 러시아에선 차관 제공이 시장공략의 가장 효과적 수단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한국기업들을 위해 러시아시장에 크레디트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됐던 한국의 국책은행들마저 철수한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러시아는 옛 소련 붕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자칫하면 우리처럼 외환위기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서방 선진국들에 원조의 손을 내밀고 있다. 그러나 자원.군사대국인 러시아는 우리가 그렇게 무시하고 버려둬도 되는 나라가 아니다.

외교를 알고 북방의 중요성을 안다는 현 정부아래서 어떻게 이같은 사태가 벌어지는지 모르겠다.

장기적 안목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않는다면 한국에 새로운 시장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김석환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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